[여론마당]유한태/진퇴양난의 ‘거꾸로 고속철’

  • 입력 2004년 4월 11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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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속도혁명’을 낳는다는 고속철이 4월 1일 개통됐으나 전력공급장치 이상이나 입석 탑승문제 등으로 출발부터 순탄치 못하다. 의자는 젖힐 수 없고 무릎은 앞좌석에 닿으며 ‘거꾸로 좌석’에 앉으면 현기증과 구토증이 생긴다는 항의와 호소가 빗발치고 있다는 보도다.

‘첫 술에 배부르랴’는 속담만 믿고 나아지려니 자위하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다. 매표 혼란 등 운영상의 허점이야 개선하면 되겠으나 앞서 지적한 승객 불만은 많은 이용객들에게 급성·만성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철저한 검증과 예방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공간지각(空間知覺)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철에 역방향으로 앉은 승객은 진행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그 속도 이상의 속도를 지각하게 된다. 이것을 시지각(視知覺) 이론에서는 운동시차(運動視差)라고 부르는데, 관찰자가 먼 곳을 볼 때보다 근경을 볼 때, 또는 앞으로 달릴 때보다는 뒤로 달릴 때 이 운동시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돼 시지각의 일대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늦든 빠르든 앞으로 달려 온 장기간의 시각경험과 관성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역방향 초고속’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엔 인체공학적으로도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번 고속철 소동과 관련한 문제의 본질은 당국의 거시적 안목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우선 시지각적, 인체공학적, 디자인적 사전조사가 소홀했다. 혹은 선진국의 사례를 연구해 여러 단점을 없애기만 했어도 ‘고통철’이라는 여론비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계약 입찰 당시 제시된 좌석배열 시스템이 구형 모델은 아니었는지도 의문이다. 미래를 멀리 내다봐 예상되는 설계변경을 최소화했어야 했다. 아울러 프랑스 알스톰사와 교섭 당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유지관리비나 품질보증기간 등을 꼼꼼히 점검 확인했어야 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철도청이 품질보증기간(개통 후 2년) 동안 좌석배치 등 구조를 바꾸면 그때부터 프랑스 제작사가 하자보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계약했으며, 만약 철도청이 좌석개조를 요구하려면 재계약해야 하고, 제작사는 재료비와 인건비, 유지관리비 등 1000억원 이상을 요구할 것으로 추정된다니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실을 호도하려는 듯 건교부는 “앞으로 3달 동안 설문조사와 전문가 검토를 거쳐 좌석개조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임기응변식으로 발표하면서 외국사례를 들어 한국승객들이 너무 유난스럽다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또 당국이 내놓은 개선책도 5% 할인이니 10% 할인이니 하는 숫자 놀음에 머물러 불만에 찬 승객들을 달래기엔 크게 못 미친다.

이런 궁여지책으로는 ‘거꾸로 고속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1000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지금 당장 좌석배치를 개조할 수도, 승객들에게 계속 불편을 참고 견디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정부는 현명하면서도 납득할 만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유한태 숙명여대 교수·산업디자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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