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나도 시민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4월 9일 18시 39분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꼭 찍어야 할 분들을 고르시어 낙선대상이라고 발표하시느라….’
총선시민연대 토론방에 오른 글이다. 내용보다 글쓴이의 신분이 눈에 띈다. 총선시민총연대 본부장. 그는 친절하게 괄호를 열고 참고:총선시민총연대본부 구성 인원 2명, 본인과 집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시민이 나서는 ‘反民主 정치’ ▼
‘참여정부’ 들어서 가장 고마운 것은 내가 옳다고 배웠던 개념이 다른 의미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일이다. 가치전복(顚覆)이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국민 참여가 활발할수록 민주주의가 꽃핀다든지, 시민단체란 시민의 뜻을 모아 공공선을 좇는 착한 모임이라는 등의 교과서적 믿음을 돌아보게 해 주니 ‘계몽정부’를 만난 것 같다.
총선시민총연대 본부장의 글이 웃기지 않는 이유는 이 단체나 총선시민연대나 시민전체를 대표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나도 시민 맞다. 그런데 나는 총선시민연대와 연대한 일 없으며, 그들에게 내 의사를 위임한 적도 없고, 나를 대변해 달라고 그들을 선출한 바는 더더구나 없다.
총선시민총연대본부 구성원이 둘뿐이라고 웃을 일도 아니다. 민간단체총람에 따르면 2003년 비정부기구(NGO) 중 69%가 회원 1000명 이하다. 80%는 직원 10명이 안 된다. ‘시민단체에 시민 없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그렇다고 그들만의 단체라 할 수도 없다. 4년 전 총선시민연대가 벌였던 낙선운동을 보자. 낙선 대상 후보의 68.6%, 수도권에선 95%가 떨어지는 성공을 거뒀다. 그렇게 구성된 국회가 이젠 부패 무능하므로 또 낙선시켜야 한단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잘못된 꼴이니, 이 단체가 정당이라면 탄핵감은 못 돼도 물갈이 대상은 돼야 마땅하다. 그런데 책임을 물을 길도 없어 답답할 뿐이다.
기실 시민단체란 설립 목적에 맞는 일만 중시하는 이익집단의 특성을 지닌다. 반면 국가는 정치 경제 사회적 비용과 효과를 두루 판단해 정책을 결정하고 법을 만들고 이를 집행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국가행정을 그 분야 전문가인 공무원에게 맡기고, 다양한 분야에서 뽑힌 국회의원에게 대의(代議)민주주의를 하도록 위임한 것도 이런 고도의 종합예술을 위해서다. 국정운영을 잘못했으면 선거로 심판하면 된다. 이 과정에 아무도 뽑지 않고 아무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시민단체가 개입하고, 국가가 결정한 정책이 시민단체의 압력에 뒤집히는 건 언어도단이다. 국가부도사태가 났거나 그 단체가 왕정부기구라도 된단 말인가.
시민의 이름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집단은 갈수록 느는 추세다.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이라는 숨차게 긴 이름의 단체가 나타나 국익에 따라 국가가 결정한 파병정책을 엎으라고 나섰다. 앞으로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해 민주헌법수호비상시민총연대 같은 단체가 나서 거부투쟁을 벌여도 대책 없을 판이다.
그들은 국회가, 정부가 할 일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참여는 가장 저급한 차원의 참여 폭발이다. 정당과 의회 등 제도를 통하지 않고 저마다 제 말만 옳다니 사회갈등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제도권 밖 사람들이 그들만의 수단을 통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새뮤얼 헌팅턴은 ‘근위병 정치(praetorian politics)’라 했다. 군인이 총칼로 정치에 뛰어드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다. 독재자가 공권력으로, 부자가 뇌물로, 노동자가 불법 파업으로, 이익단체가 집단의 힘으로 자신의 요구를 쟁취하는 것도 똑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정치꾼 단체는 정치판에 가라 ▼
자기 시간 쪼개 가며 정치권력을 감시하고 사회 발전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이 아니라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같은 코드의 정부와 공생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 변혁으로 시민을 움직이는 전업 정치꾼 단체는 정치권으로 가는 게 정직하다.
만일 시민단체라는 권력을 잃을까 겁나서, 선거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못 간다면 부디 그 단체에서 ‘시민’이라는 고갱이를 빼 주기 바란다. ‘시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시민단체를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나오기 전에.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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