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단어]화장

  • 입력 2002년 3월 21일 14시 33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화장에 열을 올린 사람은 로마인들이었다. 로마의 귀족 여인들은 매일 아침 몸 치장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신체의 모든 구멍을 닦고 긁어내는 ‘클렌징’이 첫 단계. 가슴, 팔, 겨드랑이, 다리, 코 안의 털을 제거하는 ‘기초 화장’이 끝나면 얼굴에 납분을 바르고 안티몬으로 아이라인을 그리는 ‘색조 화장’으로 마무리했다. 뿔을 빻아 치아도 백색으로 입히고 여드름과 사마귀는 애교점을 그려 가릴 정도로 화장에 공을 들였다.

화장이라면 한국인들도 빠지지 않는다. 주한 프랑스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국민 1인당 화장품 소비량이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위다. 화장에 열을 내기는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다. 최근 13개 기업이 회계장부 상 ‘분식(粉飾)’ 결산을 한 혐의로 금융감독 당국으로부터 무더기 제재를 받았다. 정도는 다르지만 화장 안 하는 기업이 없다는 게 회계사들의 전언이다. 신용 대출, 세금 문제, 주가 결정이 걸려있는데 맨 얼굴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용기있는 기업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말이다.

로마인들은 납분으로 인한 중금속 중독증세로 처음엔 낯빛이 변하더니 결국 전신 쇠약에 걸려 제국의 패망을 막아내지 못했다. 엔론이니 대우니 한보니 분칠이 심했던 기업들의 말로도 다르지 않았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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