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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캐릭터열전]극과 극 달리는 여인의 속내

입력 2001-10-29 18:33업데이트 2009-09-1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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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글로리아 스완슨)는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스타였지만 이제는 잊혀진 여인이다.

어느날 선셋대로에 있는 그녀의 호화저택에 한 불청객이 찾아든다. 월세와 자동차 할부금을 갚지 못해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는 삼류 시나리오작가 조(윌리엄 홀든)다. 영화 ‘선셋대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남녀의 기이한 동거 생활을 축으로 전환기 할리우드의 후일담과 인생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시나리오 작법을 논할 때 ‘선셋대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첫째, 죽은 자의 내레이션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조는 노마의 총에 맞아 죽고, 이후 보여지는 장면들은 모두 그가 회상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죽은 자 특유의 담담한 회한과 페이소스가 일품이다.

둘째,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다. 이 영화에서 플롯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대신 노마라는 캐릭터에 대한 전방위적 고찰만이 현란한 변주를 이루고 있는데, 캐릭터가 워낙 강렬하면서도 인상적이다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를 끌어간다.

노마는 다면체의 캐릭터다. 우아하고 천박하며, 아름다운 동시에 추하고, 귀여우면서도 난감하며, 강하되 가련하다. 조의 운명을 눈짓 하나로 좌지우지할 때 그녀는 막강한 권력자이지만, 조의 사랑을 애걸할 때 그녀는 질투에 눈이 먼 가련한 소녀일 뿐이다. 도대체 이 천변만화하는 캐릭터들이 한 인간 속에 모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놀랍지만 그렇다. 노마는 지극히 잘게 부서진 거울 조각들이 끝없이 서로를 비추며 배신하는 만화경과도 같은 존재다. 글로리아 스완슨은 필생의 연기로 이 복잡다단한 캐릭터를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선셋대로’는 무성영화시대의 거장들이 만들어낸 종합선물세트다. 글로리아 스완슨은 실제로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녀의 매너리즘 연기는 그러므로 짙은 향수와 씁쓸함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

그 뿐 아니다. 노마의 신비한 시종 맥스 역을 맡은 배우는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감독이었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이고, 그녀와 침묵의 카드게임을 벌이는 ‘밀랍인형들’ 중의 한 사람은 유명한 코미디의 제왕 버스터 키튼이다. 자신들의 시대를 기꺼이 희화화하고 그것의 비극적 몰락을 담담히 그려낸 그들의 예술적 결단과 용기가 경건한 찬탄을 자아낸다.

노마라는 캐릭터에서 우리는 쓰라린 인생유전을 본다. ‘선셋대로’에서 우리는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적 성취를 본다. 빌리 와일더가 남긴 이 혼신의 걸작을 무려 반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동네 비디오숍에서 빌려 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시나리오작가>besmart@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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