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금강전]金夏鍾의 구룡폭圖

  • 입력 1999년 7월 7일 18시 29분


김홍도의 구룡폭圖
김홍도의 구룡폭圖
유당 김하종(?堂 金夏鍾·1793∼?)이 금강산 경치를 그린 ‘풍악권(楓岳卷)’은 1991년 미국 소더비 경매에 등장했다가 국내로 반입돼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된다.

이 서화첩은 조선 말기의 실학자이자 이름난 서예가인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1814∼1888)이 1865년 금강산을 유람한 직후 묶은 것이다. 그는 제물포조약 체결에 참여한 친중국적 개화파 인물. 자신의 기행문인 ‘풍악유기(楓岳遊記)’와 김하종의 금강산도를 합첩(合帖)한 이 서화첩은 지난호에 소개한 이풍익의 ‘동유첩’과 함께 19세기 금강산 소재의 문학과 서화가 조화롭게 만나는 전형을 보여준다.

이유원은 고종 즉위년(1864) 좌의정으로 있다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는 바람에 외직인 수원 유수로 좌천됐다. 그 직후 1865년, 그는 금강산여행을 떠났다. 만년에 정치적으로 울적하면서도, 한편 홀가분한 마음으로 8월 18일(음) 집을 나서 9월6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유원 자신이 기행문에서 밝혔듯이 ‘산은 깨끗함을 생각케 하며,물은 움직임을 생각케 하며, 돌은 곧음을 생각케 한다”는 선비의 풍류정신을 펼쳤던 것이다.

‘풍악권’에는 ‘동유첩’을 꾸민 이풍익이 가지 못한 만물상과 외금강구역의 답사까지 들어있다. 여기에 영평의 화적연부터 정자연, 피금정 등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의 명승지도 포괄하고 있다. 단발령―내금강―외금강―해금강에 이르는 가장 보편적인 금강산 코스를 답사한 것이다. 이유원의 여정에 김하종이 동행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김하종이 금강산 명승도를 제작해 주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다섯권의 ‘풍악권’은 ‘풍악유기’를 비롯한 이유원의 기행시문이 한 권이고, ‘헐성루도(歇惺樓圖)’‘명연도(鳴淵圖)’‘묘길상도(妙吉祥圖)’‘만물초도(萬物草圖)’ 등 58점의 명승도와 그 명승을 설명하는 기행시문이 나머지 4권으로 꾸며져 있다.

이 화첩에 그려진 금강산 그림들은 이풍익의 ‘동유첩’에 들어 있는 그림보다 한층 가벼워진 스케치풍이 특징. 먹선 필치와 엷은 담채가 맛깔스럽다. 화폭의 크기도 두 배 이상으로 커져 시원한 화면을 연출하고 있다. 기본적인 실경포착 방식과 구도법은 김홍도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필묵법은 김하종이 개성적으로 소화한 것이다. 김하종 말년의 무르익은 솜씨가 전면에 녹아 있다. 그 개성미는 겸재 정선(謙齋 鄭),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기야 이방운(箕? 李昉運) 등 18세기 선비화가들의 화풍을 참작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와 좀 더 멀어진 한편 싱거워진 선묘와 설채(設彩)구사는 19세기 후반 조선 문화 쇠퇴기에 새롭게 부상한 북산 김수철(北山 金秀喆)류의 신감각풍 산수 경향과 유사하다. 마치 근대적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해맑은 화풍이다. 그런 탓에 풍악이 짙은 가을색과는 약간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 중 ‘구룡폭도’는 김홍도식 구도를 가장 뚜렷이 배운 그림이다. 구룡폭은 높이 74m, 너비 4∼5m로 그야말로 우뢰와 같은 폭포소리가 장관인 우리 나라 3대폭포 중의 하나. 이미 신라말 은둔자였던 최치원(崔致遠)은 ‘천길 흰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 만섬 진주알이 쏟아지는 듯하다’는 구룡폭 명시를 남겼다. 또 괴퍅하고 기이한 행동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인물 최북(崔北)은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승에 왔으니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못에 뛰어들었다고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 8월 구룡폭포에 올랐을 때 내리쏟아지는 폭포보다 계곡을 병풍처럼 떡하니 가로막은 시커먼 암벽이 더 인상깊었다. 그 암벽의 괴량감(怪量感)을 그린 화가가 바로 단원 김홍도이다. 그 작품을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 김하종의 ‘구룡폭도(九龍瀑圖)’는 이 김홍도의 작풍에 따라 폭포보다 암벽의 괴량감에 더 주목해 현장을 포착한 그림이다. 김홍도의 ‘구룡폭도’보다 회화적인 유연성은 떨어지나, 건필의 진한 농먹을 약간 가해 암벽의 중량감을 입체화함으로써 나름대로 현장의 감명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구룡폭에 대한 첫인상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김하종은 조선 후기 화원(畵員)의 명문을 형성한 개성 김씨 가문 출신으로 화원 김득신(金得臣)의 셋째 아들이다. 현재 외금강 옥류동 계곡 입구의 앙지대(仰止臺) 바위면을 잘 살피면 ‘김하종’이라는 각자(刻字)를 발견할 수 있다. 김홍도의 아들인 ‘긍원(肯園)’과 함께 ‘김하종, 경오4월(金夏鍾,庚午四月)’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경오년은 1870년이다. ‘풍악권’나온 지 5년 후의 일로, 그가 말년에 80세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금강산을 여행했음을 알 수 있다. 김하종은 말년까지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해, 1875년에는 궁중의 기록화 제작에 발탁되기도 했다.

‘풍악권’이 보여주듯이 19세기 후반 금강산의 탐승지역이 확장됐다. 또 기행시문과 그림이 어울린 서화첩이나 기행시문집이 이렇게 활발하게 제작된 것은 여전한 금강산의 인기를 확인케 해주는 일이다.

이태호(전남대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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