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 읽기]압구정동엔 압구정이 없다

  • 입력 1999년 5월 17일 21시 43분


"바빌론 강가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노라.”

유배된 민족이 눈물과 서러움을 쏟아도 강물은 유장히 흘렀다. 오가는 인걸들이 어떻게 노래하든 산천은 의구했고, 그러기에 강변은 흐르는 강물 너머 흐르는 시간을 관조하는 곳이 되곤 했다.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 일대의 한강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다. 강폭은 넓어 호수와 같으니 동호(東湖), 강 북쪽은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르기에 옥수(玉水)라는 이름도 얻었다. 멸시와 영광의 나날을 다 보낸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여생을 보낼 정자를 지은 곳도 이 절경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배기였다. 압구정(狎鷗亭)에 앉은 그는 침침해지는 눈길로 멀리 북한산을 가늠하곤 했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은 오가다 사라지는 갈매기같다고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문사와 권신이 머물던 압구정은 사라졌다. 빈 터만 남은 그 자리에 서면 한강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현대아파트 72동의 거실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70년대 한가롭던 한강 백사장에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이렇게 바뀐 것이다.

한강변은 택지조성을 위한 매립장이 되었다. 이른바 공유수면매립공사.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고 유명해진 할아버지도 후손들이 한강을 메워 땅을 팔아먹는 기술을 개발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건설회사들의 사유재산이 증식되었다. 그 땅 위로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압구정동에는 생활보호대상자가 없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부유층을 짚어주는 보통명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아파트는 덩달아 고급주거형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주거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파트가 이루어낸 공도 있다. 아파트가 없었으면 서울은 담과 지붕만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주택난을 해결할 길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파트가 이루는 도시의 풍경은 여전히 험악하기만 하다.

건설회사들에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되 아파트는 아파트였다. 산은 불도저로 밀고 강은 포크레인으로 메웠다. 심지어 논밭 한가운데에도 고층 아파트가 등장했다. 대강 지어 빨리 파는 것이 길이요 진리였다. 아파트는 시멘트블록 찍어내듯 만들어내기만 하면 분양이 되었다. 에어컨을 설치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에어컨 실외기 놓을 자리는 만들어놓지 않았다. 쓰레기통과 자전거 놓을 자리도 변변히 없었다. 물 쓰는 곳이라고 바닥에 무작정 경사를 두는 바람에 균형잡아 세탁기 놓는 일은 이사 때마다 겪어야 할 통과의례처럼 되었다. 건축가와 건설회사의 무책임으로 전국의 아파트는 짓는 순간부터 속속 슬럼화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지원금융으로 대변되는 경제위기는 도시경관이란 점에서는 다행스런 사건이었다. ‘지어라 그러면 팔릴 것이요’라는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차장을 지하로 몰고 편의시설도 대폭 강화한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갈 길은 멀다. 투자가치를 운위하는 아파트 광고가 사라져야 한다. 산 속의 환경친화 주거공간이라고 하면서도 산을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는 만행이 중지되어야 한다. 강이 보이는 아파트라고 하면서 절벽처럼 강 앞에 버티고 서는 이기심이 사라져야 한다.

압구정동은 강을 북쪽에 끼고 있다. 거실이 강을 면하느냐, 해를 면하느냐는 건 고민의 주제가 될 만도 했다. 그러나 건설회사는 아파트는 남향이어야 분양된다는 계명을 지켰다. 남동향이든 남서향이든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은 한강이 아닌 앞 동의 화장실이 되더라도 좋다고 믿었다. 한강 남쪽 강변의 아파트들은 모두 강을 등지게 되었다.

당연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시인묵객이 아니라도 시원하게 강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입주자들은 부엌의 벽을 뜯고 강을 향해 대형 유리창을 내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서로 다른 인테리어업체를 불러 망치를 들이댔으니 윗집과 아랫집의 창이 같을 수가 없었다. 크고 작은 창들이 제멋대로 등장한 한강변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입주해 산다고 해도 믿을, 그런 풍경이 되었다.

아파트는 도시풍경 뿐 아니고 거실풍경도 바꿔놓았다. 곳곳에 기둥이 있는 한옥의 대청에서 빈 벽면은 대개 길죽한 모양이었다. 이런 벽에 걸 그림은 동양화는 위아래로 길든지 옆으로 길어야 제대로 된 맛이 있다. 한국화라고 하든 동양화라고 하든 그렇게 길죽한 그림이 어울렸다. 공간은 어두우니 색이 어슴프레한 묵화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벽돌로 짓는 주택의 시대를 지나 철근콘크리트로 짓는 아파트의 시대가 왔다.벽면은 시원하게 넓어졌다. 아파트 거실 창문의 크기는 거실 폭만큼으로 넓어졌다. 단독주택의 천장에 어두운 나무널이 쓰이던데 비해 아파트 천장에는 석고보드가 붙여졌다. 그 위에 밝은 색 벽지나 페인트가 입혀졌다. 밝아진 거실의 넓고 밋밋한 벽에는 그만큼 널찍한 화폭과 환한 색의 그림이 어울렸다. 서양화가 적당했다. 가로나 세로로 길죽한 우리의 전통 그림이 아니라 가로 세로 비율이 비슷한(우편엽서 정도의 가로세로 비율인) 서양화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화랑에 들러 그림을 사는 사람은 대체로 최고 부유층에 속한다. 이들이 대부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거실에 앉아 있으니 화랑도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인사동의 화랑들은 압구정동 옆으로 이사를 했다. 다루는 그림도 달라졌다. 청담동의 화랑가에서 동양화는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동양화를 그리는 이들도 화폭에 과감히 색을 넣어야 생존을 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의 눈치는 얼마나 빠른가. 대학입시의 커트라인에서도 서양화과와 동양화과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압구정동에서는 압구정도 한강도 지워졌다. 압구정터에서 한강으로 가는 길은 멀다. 아파트단지를 돌고 돌아 도로를 건너 강변에 이르면 높기만한 강둑이 발길을 막는다. 그 너머에는 시속 1백㎞로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만 가득하다. 곳곳의 경비초소는 이유없이 서성이는 그대를 내몬다. 한강으로 가려면 동호대교나 성수대교까지 가서 동굴같은 한강시민공원 진입로로 들어서야 한다. 강둑에 올라 매연이 뿌연 도시를 보자. 우리에게 한강은 과연 무엇인가. 아름다운 서울을 이야기하는 이는 누구인가. 압구정 강가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며 울었노라.

<서현>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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