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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우리거리 읽기]무대장치같은 古都들

입력 1999-03-29 19:06업데이트 2009-09-24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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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그대여, 비빔밥과 콩나물 국밥만 먹고 이 거리를 떠나려는가. 후백제의 도읍 완산(完山)은 단지 그대의 허기진 한 끼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전주부성(全州府城)의 남문, 풍남문(豊南門)에 들러 고도(古都)에 대한 예를 다하라. 전주시의 로고는 비빔밥이 아니고 풍남문이다. 몇 번을 불타고 고쳐지었어도 전주의 터줏대감임에 틀림 없다.

경기전(慶基殿), 조경단(肇慶壇)을 들러도 좋다. 조선 태조의 영정, 그리고 전주 이씨 시조 위판(位版)이 봉안된 곳. 세월은 지났다. 이제 경기전은 드라마 ‘용의 눈물’의 촬영장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재현된 태종의 왕위계승 현장이 된 것이다. 사극의 제작자가 좋은 그림을 만드는 거리를 찾아내기도 어려울 만큼 우리의 도시에서 과거는 사라졌다. 경기전은 그 어려움 속에서 선발되었다. 경기전의 안팎에 세워진 목판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세상은 바뀌었다. 경기전의 권위는 이제 텔레비전 드라마의 출연 경력에 넘어가고 말았다. 경제논리도 끼어 들었다. 관광객들의 사진촬영을 위해 왕과 왕비의 의상도 마련되었다. 경기전도 왕가 시조의 권위만 내세우면서 수염만 만지고 있지 말고 지역경제발전에 한 몫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씁쓸하지만 승복해야 할 논리가 되었다.

우리의 전통건축은 무대배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데렐라와 프린스차밍을 꿈꾸는 남녀들이 왕자와 무수리 대신 들어섰다. 검은 양복과 흰 드레스를 입고 궁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대사는 한마디도 없어도 모두 연극의 주인공이 된다. 임금님은 사라졌어도 건물은 남았고 모두 새로운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신랑 신부라도 없으면 얼마나 적적하겠냐고.

경기 용인민속촌은 더욱 거대한 무대세트다. 옛날에는 우리의 것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사라진, 혹은 사라지려는 것들을 모아 놓았다. 아예 등장인물들도 과거의 어느 모습으로 차려 입고 마당도 쓸고 풀무질도 한다. 관람객은 투명인간인 척 들여다보면 된다. 그러나 배경과 소품의 치밀함이 없으면 관객은 연극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임금님으로 등장하는 배우는 손목시계는 풀어놓아야 한다.

걷다보면 18세기의 어딘가를 걷고 있는 것으로 느껴져야 민속촌의 연극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속촌은 손목시계를 풀어놓지 않고 있다. 바로 담 너머에는 새로 만든 놀이동산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물레질하는 아주머니 뒤로는 놀이 동산의 요란한 음악소리, 기차소리가 들린다. 연자방아, 한약방, 장터, 유기공방과 바이킹, 회전목마, 눈썰매장이 같은 무대에 뒤섞여 있다. 그것이 민속촌가족공원이다. 외국인에게 보여주겠다고 자랑하는 우리의 문화다.

다시 전주로 가자. 전주에서 어줍잖은 무대 배경들은 보고도 그냥 지나가자. 못 볼 것을 본 것으로 치자. 전통건축을 재현한다고 하는 콘크리트 건물들. 기차역, 박물관, 공중전화 박스, 버스정류장, 결혼식장. 모두 기와를 머리에 얹고 있다. 빙상경기장, 동물원까지도 참을 수 없는 전통의 어색한 무거움을 머리에 얹고 있다. 콘크리트와 플라스틱으로 번안된 전통. 전주는 시침을 돌려 사라진 과거의 시점에서 도시의 모습을 각인하려고 한다. 경주(慶州)라고 다르랴. 부여(扶餘)인들 다르랴.

우리에게는 강박관념이 있다. 20세기의 격동기를 살아남지 못한 과거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실체가 없으면 껍데기만의 모형이라도 만들어 보여줘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관청에서 발주하는 건물은 공식처럼 기와집이 요구되었다. 모두 주어진 대사를 외웠다.

“그 건물에는 어떤 전통의 냄새가 들어있느냐”고 건축가들을 다그쳤다. 건축가들은 잠실 올림픽경기장을 만들면서도 백자의 선(線)이 있다고 둘러대야 했다. 21세기의 월드컵 축구장에도 건축가들은 방패연과 소반을 갖다 대야 했다. “우리의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면죄부를 받았다. 전통은 그렇게만 다가오는가.

사랑하는 그대여, 눈을 떠라. 모양을 보지 말고 마음을 읽자. ‘전통건축의 처마곡선미’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둘 때도 됐다.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처량한 미의식은 너무 오래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다. 우리의 교과서는 우리에게 청자에서는 색, 백자에서는 선만 보라고 강요했다. 우리의 모범생들은 그 문장을 외웠고 시험에 나오면 어김없이 답을 맞췄지만 실제로 볼 줄을 몰랐다.

전통기와집은 나무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건물 모양의 결정체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나무라는 재료를 다듬고 또 다듬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기와지붕에서 처마의 외곽선만 보지는 말자. 용마루에서 죽죽 뻗어 내린 수키와의 박력, 막새기와의 묵직한 모서리도 보자. 날개 같은 서까래와 공포도 보자. ‘선(線)’을 잊고 ‘힘’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는 맞배지붕의 아름다움도 찾을 수 있게 된다. 충남 예산 수덕사(修德寺) 대웅전도 이제야 제대로 보이게 된다.

청자는 흙을 빚어 만든 보석이다. 종이장처럼 얇은 구석구석, 모서리를 보라. 놋쇠로 청자모양을 만들어 푸른 페인트를 칠해 놓는다고 고려청자의 전통이 계승되지는 않는다. 콘크리트로 만든 목조형 기와집 안에서 전통이 숨을 쉬지는 않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쇼비니즘 냄새가 나는 슬로건은 거둬들일 때가 되었다.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된다. 아쟁이든 바이올린이든 관계없다. “모든 시대의 건축가들은 그 시대의 모습을 파리시에 남길 권리가 있다.” 지금의 프랑스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가 파리시장으로 있을 때 한 이 말은 프랑스를 문화의 선두에 서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

전통은 교과서의 문장을 외우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읽는데서 살아온다. 흙을 빚고 나무를 깎은 마음을 읽자. 콘크리트로 기와집 모양을 만드는 어설픈 연극은 주위의 다른 나라들에게 맡겨 두자. 21세기의 건축은 21세기의 이야기를 하게 하자. 기다려도 고도는 다시 오지 않는다.

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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