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710>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3월 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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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양군 모두 진세를 벌이는 동안에 날이 저물고 밤이 왔다. 섣달 중순의 길고 추운 밤이라 양쪽 진채에서 피어오르는 화톳불로 해하의 하늘이 훤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모처럼 격식을 갖춘 대회전(大會戰)이어서인지 양군 모두 자잘한 야습(夜襲) 걱정 없이 편히 쉬었다.

이윽고 결전의 날이 밝았다. 먼저 싸움을 돋운 것은 패왕 항우 쪽이었다. 마지막 판돈을 건 노름꾼이 받아 쥔 패를 서둘러 깨듯 패왕도 자신의 운명에 조급해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벽같이 군사들을 깨워 아침을 먹인 패왕은 해가 뜨기 바쁘게 진문(陣門)을 열고 나가 한왕을 찾았다.

“한왕은 어디 있는가? 어서 나와 과인의 말을 들으라!”

패왕이 그렇게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 한군의 진문이 열리며 한 떼의 인마가 나왔다. 번쩍이는 갑옷투구에 요란한 기치를 앞세우고 있었으나 한왕 유방의 황옥거(黃屋車)는 보이지 않았다. 한왕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벌써 패왕의 눈길이 실쭉해 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장수가 나와 채찍으로 패왕을 가리키며 비웃었다.

“거기 있는 것은 하늘도 몰라보고 땅도 몰라보고 사람도 몰라보는 갓 쓴 원숭이[목후이관]가 아닌가? 무슨 일로 우리 대왕을 찾는가?”

갓 쓴 원숭이란 말은 패왕이 일껏 차지한 함양과 관중을 버리고 팽성을 도읍 삼아 초나라로 돌아가려 하자 그걸 말리다 안 된 어떤 서생이 패왕을 가리켜 한 말이다. 패왕은 분김에 그 서생을 죽이고 말았지만 그러고도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갓 쓴 원숭이란 조롱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패왕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은 그렇게 외치는 장수가 바로 한신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금은보석을 아로새긴 갑옷투구를 걸치고 은 안장을 놓은 백마에 높이 올라앉아 있어도 일년 넘게 곁에 두고 집극랑(執戟郞)으로 부린 한신을 패왕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너는 전에 과인의 창이나 들고 다니던 종놈 아니냐? 너같이 천한 것과는 입 섞어 말하고 싶지 않으니 네 주인 유방더러 어서 나오라고 하여라.”

패왕이 대뜸 목소리를 높여 한신을 꾸짖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한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한 번 더 패왕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니까 세상이 너를 갓 쓴 원숭이라고 욕한다. 하지만 땅을 몰라보아 천하의 도성 함양과 비옥한 관중을 버리고, 사람을 몰라보아 범증의 충의와 내 재주를 받아주지 않은 것은 좋으나, 하늘을 몰라보아서는 아니 된다. 우리 대왕은 하늘이 천하를 맡기려 하시는 분이니 그분이 곧 하늘이다. 네 어찌 하늘을 몰라보고 함부로 오라 가라 하느냐?”

한신의 그와 같은 말에 패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패왕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목소리만 한층 높였다.

“명색이 한 나라의 군왕(君王)으로서 전서(戰書)내어 싸움을 청했으면 마땅히 유방이 진두(陣頭)에 나와 과인을 맞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천한 종놈을 대신 내보내고 군중 깊이 숨어 있으니 아무리 겁 많은 장돌뱅이라도 너무 심하구나.”

그래도 한신은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고 듣고 있다가 다시 이죽거리듯 패왕의 말을 받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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