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53)

  • 입력 1999년 10월 24일 19시 26분


시골 역에서 내리고 역사를 나서자 낯익은 산천이 펼쳐진다. 작은 읍내는 옛날 그대로인데 집과 길만 조금씩 바뀌었다. 방앗간이 있던 삼거리는 그대로였다. 벽에 나무 판자를 대고 시멘트 뿜칠로 마감한 일제 시대의 면사무소 건물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저어 앞길에서 사람들이 뛰어온다. 커다란 꽃무늬가 찍힌 어두운 색의 몸뻬 바지를 입고 누렇게 퇴색한 소매 짧은 셔츠를 걸친 노파가 달려든다.

여보….

그는 얼결에 늙은 아내의 어깨를 부둥켜 안는다. 그의 얼굴 아래 바짝 붙인 아내의 희끗한 머리털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다. 그들의 측면에서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담배 냄새가 고약한 초로의 농부와 중년의 아낙네가 함께 부여잡는다.

아부지이.

뒷전에 섰던 양복쟁이가 그들을 떼어 놓았고 주임도 그의 팔을 잡아 이만큼 끌어다 놓는다.

남들 눈이 있으니까 어서 집으로들 가세요.

양복쟁이가 말하고 주임은 그에게 귀휴에 관한 서류를 보여주며 확인시키고. 집안에 들어서면 기차에서 보던 집들보다 훨씬 쇠락한 마루와 창호지가 찢어진 방문들이 보인다. 그가 마루를 딛고 올라서는 처마 밑에 누렇게 바랜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은 액자가 걸려 있고 액자 안에서 젊은 날의 그가 일제말의 국민복에 박박 깎은 머리로 햇빛 아래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다. 젊은 아내는 흰 무명 저고리에 머리는 쪽을 지고 비녀를 꼽았다. 아내의 곁에는 학생복을 입은 남자 아이가 섰고 무릎에 갓난쟁이가 안겨 있다. 시간은 그에게만 정지되어 있었다.

귀휴 체험을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는 이 선생의 목소리는 차츰 떨리기 시작한다. 너무 가까운 과거의 일이어서 그는 미처 앞뒤 순서를 정리해내지 못한다. 누군가 그의 기억을 도와 주기도 한다.

떠날 때 중국집에서 온 가족이 점심 먹은 얘긴 아까 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게 산동루라고 오래된 집이야. 주인은 바뀌었더군.

그는 다시 어쩔 수 없이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아버지를 따라 읍내 장에 나갔다가 처음으로 얻어 먹은 짜장면 이야기다. 운동시간에 그가 몇 번이나 되풀이했던 얘기였다. 그렇지, 아무리 최근의 기억이라 하여도 갇힌 자가 겪은 일들은 아물거리는 꿈과 같다. 온전한 기억은 역시 그가 자유로웠을 때로 돌아가야만 완전해지지 않는가. 단숨에 들여마시듯 국수발을 서너 젓가락에 빨아들이고 빈 그릇 앞에서 아쉬워하고 앉았던 그에게 아버지가 자장면을 덜어주었다던가.

우리는 저 혼자라는 것을 언제나 뼈저리게 실감하는 화장실 쪽에 뚫린 작은 창가에 가서 선다. 초저녁 반달이 떠 있거나 별 몇 점이 보일 것이다. 노을이 아직도 불그레하게 남아 있는 하늘 저 아래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새 떼가 어제처럼 바로 지금쯤 날아가고 있다. 그들이 돌아가는 강변 언덕에 줄지어 서 있을 키 큰 나무들이 생각난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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