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엽교수 이미지로 보는 세상]모네 '생-라자르 기차역'

  • 입력 2001년 1월 10일 18시 56분


《언어의 시대를 지나 이미지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이제 세상은 언어와 침묵 만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통로를 찾은 것이다. 미학을 전공한 김진엽 교수가 거리를 가득 채운 온갖 이미지 속에서 세상을 읽어낸다. 》

서양 근대의 시작을 알린 것은 사상적으로는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다. 그의 모색은 자연이나 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이성이 세상을 운영해나가야 한다는 근대적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이제 왕권신수설은 사회계약설로 대치되고, 뉴턴의 법칙들이 자연을 설명하는 과학적 틀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이성의 구현체인 과학은 19세기 서양의 산업혁명을 가능케 하면서, 근대적 프로젝트를 정점에 이르게 한다. 터빈이 돌아가고 기차가 증기를 내뿜으며 철로를 질주한다.

요즘 서울 덕수궁미술관에 가보면 19세기 서양 근대를 이끌어 나갔던 기차가 이루어 놓은 정경을 만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한국 전시회에 걸려있는 클로드 모네의 ‘생―라자르 기차역’.

이 그림은 그 시대의 기차역에 대한 묘사다. 기차역에 대해 다른 묘사를 한 화가도 있었다. 가령 윌리암 프리스의 ‘패딩턴 기차역’에서는 3차원적 공간감이 두드러진 기차역의 모습이 전통적 원근법을 통해 선명히 묘사돼 있다. 모네의 그림은 이와 달리 3차원적 공간감도 없고 선명함도 없다. 그림 전체의 정경들이 2차원적으로 뿌옇게 펼쳐진다.

우리는 모네의 그림에서 그 시대가 낳은 눈의 변화와 마음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괴테는 18세기에 이탈리아로 여행하면서, 잘 닦인 도로 덕분에 40km의 거리를 31시간만에 마차로 주파했노라고 감탄하고 있다.

괴테의 감탄에도 불구하고, 마차 여행이나 도보 여행은 그 속도 면에서 19세기의 기차를 통한 여행과 견주어질 수 없다. 그리고 기차 여행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마차 여행이나 도보 여행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과 다를 수밖에 없다.

기차에서 보이는 바깥의 정경은 옆으로 스쳐 지나간다. 도보여행처럼 세상을 원근법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모네의 그림이 지니고 있는 2차원적 평면성, 나아가 인상주의의 평면성은 기차를 통해 겪게되는 시각상의 변화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옆으로 펼쳐지는 정경은 옆으로 펼쳐 2차원적으로 담는 것이 해결책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네의 그림에서는 대기나 사람들이 선명치 못하고 뿌옇게 떠도는 느낌이다. 기차로 상징되는 산업혁명은 세상의 모습을 급속도로 변화시킨다. 그 변화는 진보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불안의 모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산업화의 중심지인 도시로 밀려들지만, 대다수는 그 도시에서 떠돈다. 뿌옇게 떠도는 모네의 기차역 그림에는 당대인들의 불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는 지금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 시인 보들레르에 대한 화답이기도 하다.

문명의 변화는 세상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또한 변화시킨다. 그 변화를 예전의 방식으로 담기 힘들다면, 예술은 새로운 방식을 탐색해 나가야 한다. 모네의 그림은 서구의 근대가 낳은 변화에 대한 그러한 탐색의 한 흔적이며, 그 흔적으로 인해 윌리암 프리스의 그림보다 더 비범하다.

마침 덕수궁미술관 근처인 호암갤러리에서는 ‘근대 화단의 귀재 이인성―작고 50주기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 땅의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이었고, 또 우리의 예술은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담았을까? 회고전의 그림들을 둘러봤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탐색보다는 서양의 자취가 더 깊이 배어 있었다.

김진엽(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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