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 휴스 칼럼][4강신화]<중>‘유럽팀에도 승리’ 자심감 얻었다

  • 입력 2002년 6월 27일 19시 00분


꿈이 현실로 [로이터 뉴시스]
꿈이 현실로 [로이터 뉴시스]
화요일 밤, 전세계는 한국을 주목했다. TV카메라는 선수 한명 한명을 훑으며 얼굴에 비치는 긴장과 눈물, 프라이드를 보여줬다. 결국 패했지만 선수들은 당당했다. 나는 일부러라도 특정 선수를 지목하지 않겠다. 한국이 팀으로서 모든 것을 성취해 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모습 뒤로 2명의 친숙한 얼굴이 비쳤는데 둘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월드컵을 한국에 유치하고 거스 히딩크를 고용한 정몽준 회장의 얼굴은 실망감에 다소 어두웠고 히딩크 감독은 오히려 평온한 모습이었다.

정 회장은 사람들이 그의 정치적 야심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기본적으로 꿈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승을 꿈꿨고 조국과 함께 요코하마로 달려가 일본에서 우승컵을 다투길 간절히 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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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는 그 꿈을 위해 일했고 성취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히딩크는 그게 가능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히딩크는 현실주의자고 축구인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는 한국팀이 보인 정신력과 위기 돌파력에 깜짝 놀랐다. 그는 스페인전 승리후 서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처음에 밀린건 우리였다. 하지만 선수들은 전열을 재정비해 스페인을 밀어붙였고 이내 우리가 그들보다 못할게 없다는걸 확신했다.”

아무튼 이제 세계 축구계에서 한국의 좌표는 어디쯤 될까.

간단한 대답은 3위나 4위라는 식이다. 단순한 축구계는 공자님처럼 심오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현실은 다만 여러분이 그라운드에서 거둔 성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줄 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에 관심이 없다. FIFA 랭킹은 각 대회 사이 휴식기에도 팬의 흥분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안된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또 FIFA 스폰서들을 즐겁게하고 상위 국가들의 자부심을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톱 랭커 국가 다수가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이들은 너무도 일찍, 너무도 싱겁게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이나 세네갈, 터키처럼 엄청난 정신력과 실력을 갖춘 상대팀을 과소평가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월드컵에 관한한 프랑스나 아르헨티나, 이탈리아가 톱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이들 팀들은 마지막 결과만큼 좋거나 나빴을 뿐이다. 이게 바로 절대적인 게임의 룰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선수였던 펠레는 대회 초반 한국이 아시아 수준을 넘어 아프리카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반대로 말할걸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분의 나라에 거짓되게 칭찬을 늘어놓고 싶지 않다. 한국 선수들은 여러분의 지칠줄 모르는 응원 열기에 힘을 얻었다. 선수들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크게 성장했다. 분출하는 붉은 악마의 애국 열기는 78년 아르헨티아월드컵 이후 내가 지켜본 장면중 가장 위대한 세가지중 하나지만 홈팀은 원래 평소 실력보다 잘하기 마련이다.

현대 축구를 창시한 내 조국 잉글랜드도 66년 홈인 웸블리구장에서 단 한번 월드컵을 차지했을 뿐이다. 월드컵을 만든 프랑스가 딱 한번 월드컵을 차지한 것도 98년 파리 근처 생드니구장에서였다. 다른 대륙에서 월드컵을 차지한 나라는 브라질이 유일하다.

따라서 홈 어드밴티지는 중요하다. 물론 공동개최로 열린 이번 월드컵에서 한 개최국이 다른 개최국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팀은 매 경기를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치렀고 여러분 역시 16강전부터 마찬가지 심정으로 응원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부산, 대전, 서울 그리고 특히 광주의 길거리에서 동아일보 배극인, 양종구 기자와 함께 축제의 현장을 지켜봤다. 두 기자는 물론 내 앞에서 굳이 애국적인 자부심을 감추려 했지만 기자도 사람인만큼 터져나오는 기쁨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자원봉사자들도 지켜봤다. 멋진 남녀들로 젊고 상냥했고 총명한 머리로 언어의 장벽을 헤쳐나갔다.

아울러 군중들을 봤다. 여러분은 이겼을때나 졌을때나 수백만이 공공 장소에 모여 불같은 열기를 뿜어내면서도 폭력을 배제할 수 있다는걸 이 영국인에게 보여줬다.

내가 보기에 한국과 일본의 축제는 크게 다른 것 같다. 한국의 밤은 거의 라틴 아메리카 풍이었다. 아빠와 아이들 젊은이나 노인들이 모두 하나였다. 반면 일본은 서구 스타일이었다. 나이든 세대는 주저하며 체면을 지키려 했고 젊은 세대들은 데이비드 베컴식 헤어스타일을 하고 유럽의 거친 팬처럼 환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위협감은 느낄 수 없었다. 또 일본의 자원 봉사자들은 모든 문제를 입가에 붙은 미소와 정성으로 해결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의 월드컵 개최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문화를 가진 이웃간의 공동개최에 대해 불평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그의 결함 때문이다. 나는 재선된 FIFA 회장, 제프 블래터가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회의적이었던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걸 인정하길 바란다.

그와 전임자인 주앙 아벨란제는 2002월드컵을 일본 단독 개최로 치르기를 원했다. 그들이 내세운 유일한 불만은 공동개최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6년전 취리히에서 공동개최로 결정이 난만큼 FIFA는 아시아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좀 더 협조적이었어야 했다.

이번 대회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입장권 혼란은 멕시코인 형제가 잉글랜드에 기반을 두고 운영하는 회사(바이롬사)에서 시작됐다. TV 중계권 문제도 역시 유럽에서 비롯됐는데 골치덩어리 독일 미디어 그룹인 키르히사가 그 주범이다. 그런데도 FIFA는 월드컵 직전 3개월을 회장 선거로 다투면서 소일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회를 안전한 대회로 치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난해 9·11 미국 테러사태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협력은 가장 인상적이었다. 또 이번 대회에서 그다지 인상적인 축구는 볼 수 없었지만 여러분의 팀과 시민들은 승리자였다.

히딩크가 선수들에게 열등 의식, 콤플렉스를 털어내자고 애기했는데 그의 말은 바로 한국 사회학자들의 말이었다. 나는 전문가들이 월드컵 기간 한국인의 억압된 에너지가 분출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또 정치와 경제가 대중의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이 축구가 그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하는 말도 들었다.

랍 휴스

영국인인 나는 서울올림픽을 유치했고 이제 '대∼한민국'을 외치는 한국의 놀라운 변화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월드컵을 딱 한번 차지한후 실패를 거듭한 나라 출신이기도 한 나는 누가 한국의 이 행복감을 이어나갈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여러분의 국가적인 자부심은 깨어났다. 한 번 일깨워진 자부심은 병안에 다시 밀어넣을 수 없다. 나는 여러분이 23명의 선수들은 물론 비전과 훌륭한 경기를 통해 일어난 그 모든 것을 조절하고 이끌어갈 훌륭한 리더십을 찾길 바란다.

랍 휴스/잉글랜드 축구칼럼니스트 robbu@compuser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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