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오의 우리 신화이야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손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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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를 앓은 뒤 손님신을 보내는 ‘호구거리’의 한 장면. ‘무당내력’에 수록돼 있다. 최원오 교수 제공
천연두를 앓은 뒤 손님신을 보내는 ‘호구거리’의 한 장면. ‘무당내력’에 수록돼 있다. 최원오 교수 제공
“속담에 ‘역질 아니한 자식은 자식으로 믿지 마라’라는 말까지 있으니 위험함이 다시 비할 데 없더니….”

1908년에 출간된, 이해조의 ‘구마검(驅魔劍)’이라는 신소설의 한 구절이다. 그 저변에 ‘역질은 누구도 면하지 못하는 질병’이란 인식이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누구나 한 번은 걸린다’는 뜻의 병명인 ‘백세창(百世瘡)’으로도 역질을 칭하였겠는가. 그렇다면 그 역질을 ‘역신(疫神)’ ‘손님’ ‘마마’ 등으로 높여 칭한 것은, 분명 그것을 피해 보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심사를 반영한 작명일 것이다. 동해안 지역의 ‘손님굿’은 바로 그러한 심사를 잘 보여주는 구전신화다.

강남대왕국에 사는 세 명의 손님신이, 우리나라가 인물 좋고 밥 좋고 문물 좋다는 소문을 듣고 행차를 하였다. 처음 찾아간 곳은 한양에서도 큰 부자인 김 장자 집이었다. 그런데 김 장자는 욕심이 많아 자신의 재물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당연히 문전박대. 다음으로 손님신들은 김 장자의 집에서 하루하루 방아를 찧어주고 품을 받아 사는 노고할미의 오두막집을 찾아갔다. “우리는 강남대왕국의 손님입니다. 하룻밤만 쉬어 갑시다.” 이 말에 노고할미는 버선발로 달려 나와 손님신들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정성껏 음식 대접을 하였다. “노고할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요? 혹시 친손자나 외손녀가 있습니까?” 노고할미는 외손녀를 데리고 왔다. 손님신들은 노고할미의 외손녀가 마마를 살짝 앓도록 하여 은혜를 갚았다.

이제 노고할미가 손님신들을 배송(拜送)할 차례. 이때 김 장자는 열흘이 넘도록 노고할미가 방아품을 팔러 자기 집에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여, 거드름을 잔뜩 피우면서 노고할미 집으로 향했다. “형편없는 떠돌이 손님을 불러다 놓고 이것이 웬일이냐?” “장자님, 강남대왕국의 손님네 앞에서 부정하게 이게 무슨 말씀이오?” 노고할미는 너무도 분하고 원통해서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것을 본 김 장자. 깜짝 놀라 집으로 달아나서는 부인에게 말하였다. “여보 부인, 어서 빨리 우리 철현이를 깊은 산속에 있는 절에 피신 보내시오. 그리고 골목골목에다가 마마가 들어오지 못하게 고춧불을 피워 놓으시오.”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손님신이라고는 하지만 고춧불만은 피할 수 없었다. 손님신들은 의논 끝에 절에 피신 가 있는 철현이를 불러내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철현이를 앞세워 김 장자 집에 도착하여 대문을 들어설 때에 철현이에게 마마를 심하게 앓게 하였다. 김 장자는 하는 수 없이 손님신들에게 빌었다. “떡하고 술하고 송아지를 잡아서 배송해 드릴 것이오. 우리 철현이 좀 살려줘 보지.” 반말조였다. 그래도 이런 인간이 비는 것이 가상하여 손님신들은 철현이를 낫게 해주었다. 그러나 약속한 배송을 하지 않자 괘씸하게 생각한 손님신들은 철현이의 숨통을 아예 끊어버렸다. 철현이의 마지막 말. “재물만 알다가 삼대독자 나를 잃었으니 지금은 잘 몰라도 살다 보면 언젠가 후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부모 잘못 만나 손님네를 따라 떠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철현이는 손님신들의 막둥이가 되어 방방곡곡 따라다니게 되었다. 자신들을 잘 모신 집에는 마마를 약하게, 못 모신 집에는 심하게 주면서 말이다. 마마를 앓게 하는 것은 손님신들이지만, 그것의 경중(輕重)은 인간이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간파할 수 있다. 역신, 손님, 마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관(神觀)이 반영된 작명이 아닐 수 없다.

최원오 광주교육대 국어교육과 교수
#구마검#손님신#노고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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