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홍정수]“형님, 줄 잘 서십시오” “이렇게 가면 다음은 대표님 차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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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사퇴 이후]

홍정수 기자
홍정수 기자
#장면 1. “형님, 줄 잘 서십시오.”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 핵심 A 의원은 지난달 25일 화장실에서 마주친 또 다른 친박계 당직자 B 의원에게 이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 사실상 불신임 발언을 했던 당일 오후 열린 의원총회 도중이었다. A 의원의 한마디는 내년 4월 총선 공천을 앞두고 박 대통령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행동하라는 일종의 ‘경고’이자 ‘엄포’로 들렸다.

#장면 2. “이렇게 가다간 다음은 대표님 차례입니다.”

7일 오후 의원회관 제7간담회의실. 비박(비박근혜)계 재선의원 10여 명이 모인 자리에 김무성 대표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유 원내대표가 사퇴한 뒤에는 청와대의 다음 표적이 김 대표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던 때였다. 재선 의원들이 이런 우려를 전달하자 김 대표는 “나까지 건드리려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김 대표가 ‘공천에 관해 부당한 시도가 있을 때는 맞서 싸울 것’이라는 각오를 단단히 내비쳤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의 ‘6·25 발언’ 이후 유 원내대표가 사퇴하기까지 13일간, 현장에서 직접 본 집권여당은 ‘혼란’ 그 자체였다.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원내대표의 거취를 의총에 다시 묻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접한 새누리당 의원들은 겉으로는 △헌법정신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등 거룩한 가치를 입에 올렸다. 하지만 속내는 달라 보였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청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고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할 ‘공천권’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직감한 의원들은 셈에 바빴다. 각자의 이해에 따른 ‘각자도생(各自圖生)’에 나선 것이다. ‘민의의 전당’에서, 국정을 책임져야 할 여당에선 13일 동안 친박계와 비박계의 계파 갈등만이 존재했다.

몇몇 친박계 핵심 의원은 수시로 국회 의원회관에 모여 유승민 원내대표 몰아내기 전략에 골몰했다. 7일 오전엔 친박 성향의 충청권 의원들이 모여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촉구했다. 유 원내대표 사퇴에 반대하던 비박계 재선 의원들도 이에 맞서 7, 8일 이틀간 연달아 모여 맞불을 놓았다.

3일 새누리당 원내대표단-정책위 연석회의 직전의 한 모습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친박계 노철래 의원은 주위 의원들에게 “친박은 이리 앉고, 친이(친이명박)는 여기 앉아라”라고 말했다. 동료 의원들은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전날 김태호 최고위원이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촉구하자 대표비서실장이 육두문자가 섞인 욕을 해 당 최고위원회의가 난장판이 된 지 하루 만의 일이다. 언론사 기자들과 카메라를 통해 사실상 전 국민이 다 지켜보는 자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언의 수준을 의심케 했다.

국민의 사활이 걸린 메르스 문제, 가뭄 피해와 같은 민생 이슈는 지난달 25일 이후 순식간에 실려 갔다. ‘메르스 추경’ 예산안 심사를 위한 7월 임시국회 의사일정 합의는 몇 번씩 미뤄졌다.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결정했던 8일 의원총회에서도 의원들은 “총선 승리”만을 외쳤을 뿐 민생을 돌봐야 한다는 목소리는 묻혀 버렸다.

헌법 1조 1항의 가치를 생각하며 13일을 버틴 유 전 원내대표에게서도 민생의 가치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지난 13일 동안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친박·비박도, 청와대도 아닌 국민이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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