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학력차 반영’ 파문]<1>교육부 ‘뒤집기’

  • 입력 2004년 10월 10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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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주요 사립대가 고교 학력차를 대입전형에 반영했다는 정부 발표 이후 교육기회의 평등과 대학의 학생선발권 보장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원인과 전망, 그리고 해법 등을 모색하는 방안을 시리즈로 점검한다.》

2000년 4월 25일 서울 연세대 상남경영관에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서울 주요대학 입학 관련 처장들과 고교 진학담당 교사들이 간담회를 열었다.

대학 처장들은 이 자리에서 “2002학년도 입시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 등급제 실시로 학교생활기록부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지는데 고교에서 내신 부풀리기가 성행해 ‘고교간 특성’을 전형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앞서 1998년 10월에는 서울대 강광하(姜光夏) 당시 기획실장이 교육부 자문회의에 참석해 “고교별로 격차가 있는데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반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각 대학은 수년 전부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고교별 학력차를 대입 전형에 반영하는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현실과 이상=학생이 원하는 고교를 선택할 수 없는 현행 고교평준화제도에서 고교의 학력차가 대입 전형에 반영되면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높다.

하지만 강광하 전 실장의 지적처럼 고교간 격차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공정경쟁 원칙에 어긋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고교평준화제도는 모든 학교 학생들의 성적이 거의 같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한 반에 ‘수’를 받는 학생이 60%나 되고 고교별로 전교 1등의 수능성적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 강북 B고의 한 교사는 “수시모집에서 강북 학생들을 차별한다고 대학을 비난하곤 있지만 솔직히 내신 부풀리기를 하고 있어 떳떳하지는 않다”고 털어놓았다.

▽교육인적자원부의 모호한 태도=교육부가 그동안 사립대의 신입생 선발자율권을 강조하면서 고교간 학력차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밝히지 않은 것도 이번 파문의 중요한 원인이다.

교육부는 1995년 새 대입제도를 발표하면서 ‘사립대는 대학이 정하는 다양한 기준과 방식에 따라 자율적으로 선발’하도록 허용했다.

또 2002학년도 대입제도 개선안이 발표된 1998년에도 “고교간 학력차 인정은 불허하되 각 대학이 해당 고교의 특성과 교육과정 활동의 특징을 고려해 그 차이를 내부전형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자율”이라며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

따라서 대학들은 교육부의 이러한 방침에 따라 나름대로 전형 참고자료를 만들어 활용해 왔던 것. 대학들이 이번에 “고교의 특성과 교육과정의 특징을 고려해 전형한 것”이라고 반발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대입제도가 서울 강남 편중 불러=1990년대 중반 이후 잦은 대입제도 변경으로 전형이 다양해지면서 정보에 밝고 사교육을 잘 받은 수험생의 대학 진학이 유리해졌다.

이에 따라 지방과 강북의 우수한 학생들이 사교육 환경이 우수한 강남으로 대거 몰리면서 지역별 격차가 더 벌어지는 악순환이 생겼다.

특히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을 간다”는 ‘오해’를 낳은 2002학년도 대입제도 개선안의 혼란이 컸다. 각종 경시대회의 성적이나 특기적성을 입시 전형에 반영하게 되면서 강남 선호는 더욱 심해졌다.

2001년 3월부터 11월까지 지방에서 서울로 전학한 고교생은 3843명. 2000년 같은 기간의 2966명에 비해 29.6%가 늘었다. 이 기간에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전학한 학생도 611명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30.6% 늘었다.

한양대 배영찬 교수(전 입학실장)는 “새 대입제도에 대한 평가는 남학생의 군복무 기간을 포함해 최소 7년이 지나야 가능하다”며 “제도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자꾸 새 제도가 발표돼 혼란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友軍은 안보이고…” 교육부 사면초가▼

“교육인적자원부가 완전 포위돼 우군(友軍)이 한 명도 없는 상황입니다.”

일부 사립대의 고교간 학력차 반영 실태가 발표된 뒤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일자 교육부의 한 간부는 이번 사태가 가져 올 파문을 우려하며 이같이 말했다.

교육부는 사태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수습책 마련에 열중하고 있지만 일이 너무 꼬여 난처해 하고 있다.

9월 20일 6개대에 대한 실태조사가 시작된 뒤 간부회의 등에서 조사결과를 어떻게 발표할지 등을 놓고 수차례 토론을 벌였지만 갑론을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있는 대로 밝히자’는 주장과 사회적 파장이 엄청난 만큼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자’는 신중론이 팽팽히 맞섰다는 것.

이 때문에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는 식으로 발표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사태가 악화된 지금은 안병영(安秉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위기관리 능력을 조심스럽게 거론하며 문책론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사회적 파장 등을 고려해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할 때 ‘학자적’ 결단을 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면 돌파할 게 따로 있지…”하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당초 교육부는 전형방식에 대한 세세한 자료까지는 발표하지 않을 방침이었던 것 같다. 문제가 커지면 누구 선에서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복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특목고 우대와 강남권 합격자가 많은 자료가 언론에 보도되자 간부들도 놀랐다고 한다.

김영식(金永植) 차관이 7일 밤 김우식(金雨植)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조사결과가 사회적 파장이 클 것 같다”고 보고했지만 “있는 그대로 발표하라”고 결론이 났다는 것.

교육부의 전격 발표의 배경에는 김 실장과 안 부총리가 모두 연세대 출신이어서 되레 운신(運身)의 폭이 좁았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모교 봐주기’란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해당 대학에 대한 제재조치가 포함된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을 내세워 전교조 등이 요구하는 특별감사를 피하기 위한 포석이란 분석도 있다.

아무튼 교육부는 학부모는 물론 교원단체, 그리고 대학들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는 사면초가의 상태라는 지적이다.


이인철기자 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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