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9년 美여배우 베티 데이비스 사망

  • 입력 2008년 10월 6일 02시 56분


“200∼300년 먼저 태어났다면 그녀는 아마 마녀(魔女)로 지목돼 화형을 당했을 것이다. 그녀는 일반적 방법으로 방출할 수 없는 ‘파워’로 가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 ‘데인저러스’가 1935년 미국에서 개봉됐을 때 영화잡지 픽처포스트는 여주인공을 맡은 베티 데이비스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녀가 맡은 역은 인기를 잃은 여배우로 가까이 있는 이들을 파멸시키는 ‘팜 파탈’. 대다수 여배우들이 이미지 추락을 우려해 맡길 꺼리던 악역을 베티는 연기실력을 드러낼 블루오션으로 삼았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여배우 캐릭터의 출현에 평론가들은 극찬을 보냈고,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본명은 루스 엘리자베스 데이비스. 100년 전인 1908년 매사추세츠 주 로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드라마스쿨을 거쳐 1929년 ‘깨진 그릇’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1930년에는 유니버설 영화사의 테스트를 받기 위해 할리우드로 갔다.

“영화사 직원이 ‘대기자 중 여배우 같은 사람이 없다’며 나를 못 찾아 한참을 기다렸다”고 훗날 그녀는 회상했다. 키 162cm에 갈색머리인 베티의 외모는 평범했다. 1981년에 ‘베티 데이비스 아이스’라는 킴 칸스의 노래로 유명해진 동그랗고 도발적인 파란색 눈을 빼면.

1932년에 워너브러더스로 이적해 1934년 서머싯 몸의 소설을 영화화한 ‘인간의 굴레’에서 밀드레드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당시 좋은 역을 주지 않는다며 소속사 사장인 잭 워너를 고소한 사건으로 그녀의 ‘악녀 이미지’는 더 강화됐다.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영화 ‘제저벨’(1938년)에서 자기주장이 강한 남부 여성 역할을 맡아 두 번째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이듬해 개봉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도 맡을 뻔했지만 소속사와 제작사의 협상이 불발돼 비비언 리에게 배역을 빼앗겼다.

30대 때 침체를 겪었지만 1950년 ‘이브의 모든 것’으로 보란 듯이 컴백했다. 1962년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에서는 미치광이 노파 역으로 신들린 연기를 펼쳤다.

1983년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에도 영화, TV시리즈에 출연하던 그녀는 1989년 마지막 영화 ‘사악한 계모’를 찍고 그해 10월 6일 숨졌다. 60년간 출연한 영화와 TV시리즈는 120여 편. 4번의 결혼, 자녀와의 불화 등 온갖 어려움에도 그녀는 스크린에 머물렀고 ‘미국 영화사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로 영화 팬들의 기억에 남았다.

고령과 쇠약함 앞에서도 은퇴를 거부했던 베티의 삶을 돌아보며 20년 연기 생활을 자살로 끝낸 최진실 씨의 선택이 더욱 아쉽게만 느껴진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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