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현장]NGO들의 신년하례회 "그래도 기죽지 맙시다"

  • 입력 2001년 1월 8일 09시 35분


경실련이 정부투자기관에 후원금을 요청해 물의를 빚고 있는 가운데 4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공동신년하례회’는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시민·사회단체 대표와 회원 등 150여명이 자리를 메운 채 이날 오후 2시부터 2시간 가량 진행된 신년회는 희망차고 덕담을 나누는 신년사가 주를 이룰 것으로 기대됐으나 21세기 첫 신년하례회와는 어울리지 않게 숙연하기까지 했다.

▼관련기사▼
"앞으로 공기업 후원금 안받겠다"
시민단체 투명한 재정확보 시급

이날 주요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거의 모든 NGO들의 재정사정이 어렵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후원금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일반 회원들을 늘려가야 한다며 서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장원 전 녹색연합 사무총장의 성추문사건,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의 사외이사문제 등으로 시민단체의 위상과 활동이 위축된 상태에서 경실련의 후원금 파문이 불거져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시민단체협의회 손봉호 공동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시민운동이 가진 유일한 힘은 도덕성"이라고 전제한 뒤 "경실련 사건은 시민들의 시민운동 참여가 저조한 상태에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손 대표는 "정작 시민들이 (NGO를) 후원하지 않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후원금 모으기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시민들은 제발 시민운동을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시민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는 시민운동으로 거듭나길 바란다"며 좌중을 돌아봐 장내의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날 가장 주목을 받은 인사는 단연 경실련 이석연 사무총장.

후원금 파문으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탓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이총장은 신년덕담을 나눠야 할 자리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한 경실련의 공식 입장을 밝히는게 낫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총장은 "경실련은 자본주의적 시장질서를 지향하기 때문에 기업을 동반자로 보고 후원금을 받는 관행을 계속해 왔다"면서 "그 과정은 투명했으며 이번에 문제가 된 공기업들에도 후원금 취지를 분명히 알리고 후원금 한도인 1000만원 이내에서 후원해줄 것을 요청했다"며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입장을 개진했다.

이총장은 "경실련의 공기업 판공비 사용실태 공개와 공교롭게도 후원금을 받는 공기업이 겹쳐 마치 시민단체가 후원금을 (강제로) 요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도덕성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마치 시민운동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인 뒤 “기업이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과정이 공문으로써 투명하게 처리되는 기부문화가 정착돼야 하며 앞으로 이를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총장의 이같은 발언은 후원금 파문이 있은 뒤 '앞으로 공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경실련의 입장과 큰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다.

발언 내내 격앙된 논조를 잃지않던 이총장은 “한국사회에서 시민운동을 하기가 너무 힘들다”며 “시민운동에 대한 회의마저 든다”고 딱한 처지의 일단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어진 시민단체 인사들의 덕담도 같은 시민단체의 입장에서 경실련의 입장을 옹호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송보경 회장은 “시민운동가들은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설사 실수를 지적받는다고 해도 잘못은 반성해야겠지만 의기소침할 것은 없다. 시민들은 끝까지 시민운동을 격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린훼밀리운동연합 김재범 부총재 역시 “모든 단체들이 기금 부족으로 허덕이는 상태에서 공문 등으로 후원금을 요청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시민운동가들은 그런 일에 기죽지 말고 떳떳이 활동해야 한다. 이는 후원기금이 많아지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문제이며 이로써 시민운동의 활동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좋은 벗들의 대표 법륜 스님은 "2001년에는 비판·반대운동만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어 내는 시민운동이 돼야 한다"며 올해 바람직한 시민운동의 방향을 역설하기도 했다.

한 참석자는 "지난해 총선연대 활동 과정에서 정부 지원금이 말썽을 빚자 경실련이 '앞으로 정부 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번에 공기업 후원금이 문제가 되자 '공기업 후원금은 받지 않겠다'고 또 선언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신년하례회는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2000년을 보내고 2001년에는 활발히 운동할 것을 다짐하는 취지로 마련된 행사였지만 뜻하지 않게 시민 단체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모임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에겐 이번 모임이 일반 시민들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씁쓸한 자리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희정·안병률/동아닷컴기자 huib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