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단]공존의식이 '예루살렘' 열쇠

  • 입력 2000년 7월 18일 18시 37분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PLO)자치정부 수반간의 중동 평화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예루살렘의 장래 지위에 관한 것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예루살렘은 유대교 신자, 기독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 모두에게 정신적 중심점이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의 이성적인 노력으로도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종교적 믿음이 강하지 않은 이스라엘인이나 팔레스타인인들도 예루살렘을 ‘신성한 곳’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이스람교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언자 모하메드가 AD 610년에 설교를 시작한 이래 그곳을 신성한 장소로 숭배해 왔다. 그들은 앵글로색슨족이 영국에 거주해 온 만큼이나 오래 그곳에서 살며 종교적 의식을 치러 왔다. 따라서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 문제에서 비타협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연고권 외에도 예루살렘을 잃거나 정치적인 수난을 겪은 민족이 그후 이곳 성지에 대한 애착을 더욱 갖게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로도 증명된다.

오늘날 예루살렘이 처한 환경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민족, 유대인과 아랍인들간에 전쟁을 치른 후 한쪽은 이를 새로이 장악했고 다른 쪽은 잃어 버리는 과정에 있다. 유대인들은 약 2000년 간의 유랑 끝에 돌아와 이를 다시 다스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라는 대재앙을 겪은 후이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장악을 아우슈비츠라는 잿더미에서 다시 소생해 날갯짓하는 불사조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현대식 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이 마치 자신들의 괴로운 처지와 같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고난과 추방은 이제 시작되어 신성한 예루살렘이 나날이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 사실이든 아니든 자신들이 서방에 의해서도 모멸을 당하고 있다고 여기며 그 상징으로 예루살렘을 예로 들고 있다.

1967년 벌어진 6일전쟁은 아랍―이스라엘간의 갈등을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만들었다. 이 전쟁으로 새로운 시오니즘과 이슬람 근본주의를 잉태시킴으로써 실용적인 사고를 말살시켰다. 캠프데이비드 협상을 이끈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1981년 자국 극단주의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평화협상을 이끈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역시 1995년 자국민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치 지도자인들 감히 상대방에게 양보를 하거나 자국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협상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예루살렘은 참으로 풀기 어려운, 타협이 불가능한 난제로 보인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의 위대한 용기가 발휘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반항적이면서도 세속적인 국가로 출발했다.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 지도자들의 실용적인 사고에 의해 국가 탄생이 가능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원하고도 불가분의 수도’는 아니었다.

일례로 1947년 유엔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분할될 때 이스라엘은 현대적 개발이 되어 있는 서쪽의 근교를 택하고 올드 시티와 동예루살렘을 양보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인터내셔널 존으로 하자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 생존을 하는 데 우선권을 두었던 것이다. 1948년 전쟁 후 이스라엘은 웨스트 예루살렘을 장악했으며 1967년 전쟁후에야 예루살렘을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지역으로 선언해 버린 것이다.

예루살렘 문제는 실용적인 공존 사고가 고집 불통의 이데올로기보다 해결에 훨씬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예루살렘 문제라도 해결이 가능하다. 다시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예로 들어보자. 양측의 갈등 속에 교황은 새로운 국가, 이탈리아의 탄생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협상도 하지 않았다. 그후 엄청난 갈등을 겪긴 했으나 끝내 오늘날처럼 두 주권국가는 로마를 수도로 평화공존을 하고 있다.

<카렌 암스트롱 중동문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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