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인터뷰)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손대현 옻칠장

  • 입력 2015년 4월 20일 11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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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칠기(螺鈿漆器)는 칠공예 장식기법 중 하나로 ‘나전(螺鈿)’은 조개껍데기를 이용해 문양을 붙여서 꾸미는 것이고, ‘칠기(漆器)’는 기물, 물건, 나무 등에 칠하고 마감하는 것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손대현 옻칠장(66세)은 14살 때 쟁반에서 반짝 빛나는 자개 빛을 우연히 보고 나전칠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에디터 곽은영 포토그래퍼 김현진


과거 나전칠기장은 혼수의 최고봉으로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부 판매자가 생산량을 늘리고자 공정을 줄여 전통기법이 아닌 화학칠로 마감하여 단가를 낮추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물건을 전통방식이 아닌 공장시스템으로 만들게 되면 질이 떨어지고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 손대현 옻칠장은 전통기법이 변형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칠이라는 전통기법을 하기 쉽게 변형시키거나 공정을 줄이면 작품의 생명력이 사라집니다. 남대문단청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거예요. 무형문화재라는 이름은 전통기법의 기본을 충실하게 지키고 전하라고 나라에서 의무감과 함께 준 이름입니다. 이름의 무게가 아니더라도 수십 년, 수백 년 가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통에 대한 확고함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나전칠기는 하나의 단어로 묶여 있지만, 나전과 칠기는 그 기법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나전기능, 칠기능을 따로 두고 무형문화재도 나전장, 칠장으로 나뉘어 있다. 손대현 명장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옻칠장이다.

50년째 이어온 옻칠과의 인연

손대현 명장이 옻칠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우연 같은 필연이 있었다. 1964년 일을 하던 무역회사의 건물에 칠기공방이 있었던 것이다. 옻칠이 아닌 화학칠을 하던 공방이었지만 그곳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서 누군가 쟁반을 마감하며 광을 낼 때 자개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공방을 다니기 시작했고, 대한민국 나전칠기 옻칠의 대가인 민종태 선생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그는 민 선생에게 사사하기 위해 3년간 그가 있는 공방에 드나들며 칠을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고, 결국 1968년 민 선생의 전수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초반에는 온몸과 얼굴에 옻이 올라 고생했다. 얼굴이 퉁퉁 붓고, 가려워서 긁으면 진물이 나 남 보기에 흉할 정도였다.

“선배들이 ‘그래서 계속 옻칠할 수 있겠느냐’고 걱정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신기한 건 ‘왜 나만 이렇게 옻이 심하게 오를까?’ 하는 고민으로 춘천행 열차를 타고 잠깐 바람을 쐬고 왔는데, 그 다음 날 피부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거예요. 서서히 좋아진 게 아니라 순식간에 좋아진 거라 신기하고 기쁜 마음으로 공방에 갔어요. 그 후로 옻에 면역이 된 것 같아요.”

바라던 곳에서 배우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된 그는 퇴근 후에도 잠을 못 이루고 다시 공방을 찾았다. 옻칠은 일반 화학칠과는 달리 온도와 습도에 민감해 적절한 조건일 때만 건조가 된다.

옻은 여러 가지 훌륭한 장점이 있지만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였다. 손 명장이 다시 공방을 돌아가 체크한 것도 바로 방의 온도와 습도였다. 방에 들어가 온도가 낮으면 불을 지펴놓고 습도를 체크해 물을 뿌려놓았다.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좋아서 한 일이었다.

“겨울에는 30분 정도 일찍 가서 난로에 불을 미리 지펴놓았는데, 아침에 오는 사람들이 온기를 느끼는 것이 좋았어요. 그렇게 생활해오던 어느 날, 늘 엄하셨던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제 작업을 보며 자상한 조언과 따듯한 미소를 보여주셨어요. 그 순간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느껴지는 거 같아요.”


나전칠기의 혼과 전통을 잇다


손대현 명장에 대한 민종태 선생의 신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번은 옻칠반장의 자리가 공석이 되는 일이 있었는데, 회식자리에서 민 선생은 반에서 가장 어렸던 손 명장을 옻칠반의 책임자로 직접 공표하며 “평소 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 작품을 수출하고 있었던 민 선생은 손 명장에게 일본에 납품하는 샘플 제작을 맡기기 시작했다.

“방을 하나 내주셔서 거기에서 샘플을 만들었어요. 제가 작업하던 방은 선생님 집과 10분 이내 거리에 있었는데, 삼시세끼를 선생님께서 드시는 그대로 따뜻하게 챙겨서 보내주셨어요. 그땐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게 얼마나 큰 배려였는지 모르겠어요.”

민 선생은 집에 누가 오면 꼭 손 명장을 불러 대화 자리에 동석시키곤 했다. 하루는 일본인이 도안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민 선생은 일본인에게 반드시 한국의 전통문양을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작품이 완성되고 일본인들이 다시 찾아왔어요. 스승님은 보자기에 싸인 작품을 탁자에 내려놓으셨지요. 그러자 탁자에 앉아있던 일본인들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는 작품을 꼼꼼히 살펴봤어요. 그리고는 감동에 못 이긴 일본인들이 작품을 끌어안고는 한참 동안 ‘아름답다, 감사하다’는 말을 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제 마음에도 뭉클한 감동과 자랑스러움이 밀려왔어요. ‘내게도 저란 날이 올까?’라는 마음으로 작업실에 돌아와서 작업에 몰두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손 명장은 1980년도에 스승의 허락하에 독립했다. 홀로서기의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일거리를 나누어주는 스승의 배려로 큰 탈 없이 독립 초창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작품을 완성해 1991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그 전시회를 본 한 일본인이 2년 후에 그를 찾아왔다.

“그 일본인은 저에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며 검의 자루를 내밀었어요. 그 자루에 나전장식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분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해나갔습니다. 마침내 완성된 검의 자루를 비단 천에 싸서 일본인에게 건넸고, 일본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비단 천을 벗겨냈어요. 한순간 일본인의 얼굴에 소년과 같은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정말 잘 만들었다, 너무나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일본인의 표정에서 제 스승에게 감사해 하던 일본인의 모습이 보였어요. ‘내게도 저런 기회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기회가 이미 와있었던 거였어요.”

현재라는 시간과의 콜라보레이션

전통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손 명장 또한 그러한 숙제를 안고 기업과의 콜라보레이션 기회를 자주 만들고 있다.

‘BMW 7시리즈 코리안 아트 에디션(Korean Art Edition)’이라는 이름으로 BMW의 자동차 내장재 나전장식을 직접 맡기도 하고, 삼성전자에서 102인치 텔레비전을 개발했을 때 강화압출알루미늄 소재에 옻칠로 중동부호들의 이니셜을 새겨 수출하기도 했다.

“기존에 나무에만 했던 칠기의 범위가 넓어졌어요. 옻칠의 장점 중 하나가 어떤 소재에든 적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금속의 경우 옻칠을 해서 열처리를 하면 금속을 구부려도 칠이 튀거나 떨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어요. 전통이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하나의 기법이고, 나전칠기는 하이테크 기술로 고려시대 때 이미 그 기술이 완벽하게 완성됐어요. 그렇다면 그 기법은 유지하되 시대에 맞게 활용법을 바꿔야 해요. 금속, 알루미늄, 플라스틱 등 다양한 소재에 옻칠을 접목하고, 바뀐 디자인과 도구에 맞게 문양을 응용하는 겁니다.”

손 명장이 애정을 가지고 사용하는 문양은 단청문양과 십장생 등으로 고려 때부터 내려온 단출한 연속문양이다. 손 명장은 이러한 전통문양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꽃과 잎으로만 구성된 단청문양에 나비를 넣어서 그만의 나비단청문양을 만들었다.

“조그만 사물도 잘 관찰하면 현대적인 문양이 나올 수 있어요. 제가 얼음이 갈라진 빙열을 확대해서 만든 문양이 있는데, 직접 작품에 활용하기도 했어요. 자연에서 차용한 현대적인 문양이지요.”

나전칠기 공예품은 대통령 해외순방이나 외국 수상이 방한할 때마다 외교사절단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럽순방 때는 나비단청문양의 서류함이,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는 나전칠기 보석함이 선물용으로 꾸려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한용 선물도 나전칠기 보석함이었다.

“나전칠기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공예품입니다. 근래에는 해외의 전시회에도 나전칠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나전칠기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은 국경을 초월합니다. 많은 이들이 ‘사람이 어떻게 저런 인내를 가지고 작업을 할 수 있느냐’며 경외감을 표현합니다. 그런 관심에 힘을 얻어 저 역시 나전칠기를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전칠기를 해외에 소개할 기회는 적습니다. 나전칠기의 아름다움을 알릴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전칠기의 자연소재가 갖는 기운

나전칠기는 모든 소재가 자연소재이다. 나무도, 칠도, 조개껍데기도 자연소재인데, 그중에서도 옻은 그 자체로 갖는 효과가 크다. 옻칠은 방습, 방열, 방충의 장점이 있는데, 옻으로 만들어진 소품의 곁에 있다 보면 그 칠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 이러한 나전칠기의 긍정적 영향을 경험한 이들이 손 명장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도 있다.

“제가 만든 삼층장의 따듯한 분홍 자개 빛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는 분도 계셨어요. 그분은 그 평안을 결혼할 세 딸에게도 물려주고 싶다며, 같은 작품을 세 개 더 주문하셨지요.”

나전칠기의 제작 공정 중에는 뼈대가 되는 나무의 틀어짐을 막기 위해 삼배를 붙이는 과정이 있다. 이때 삼배를 붙이기 위해 쓰이는 접착제 역시 찹쌀을 쑨 것에다 생옻칠을 풀어서 만드는 천연소재이다.

옛 문헌에는 “중국의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 성곽 또는 문이 붙는 중요한 부위에 찹쌀풀을 쑨 것에 생옻칠을 섞어서 붙였더니, 전쟁 중 공성전으로 돌을 맞아도 접착된 부위만 깨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본 접착제의 우수성을 표현했다.

손 명장은 현재 문화재보호재단 전통문화의 집이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옻칠반 교육을 맡고 있다.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는 일반인들이 전통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소목, 매듭, 자수, 한복 등의 전통분야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옻칠반의 경우 기초반 2개, 연구반 2개, 전문반 1개로 총 5개의 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강의 초기에는 학생들의 연령대가 30~70대로 분포돼 있었는데, 요즘은 10대들도 수강을 합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3년째 배우고 있는데, 우리 전통 옻칠기술을 그대로 배우고 있습니다. 옻이 올라서 고생을 하면서도, 나전칠기의 매력에 심취되어 공방을 차리고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보면, 선생으로서의 보람을 느낍니다. 또 해마다 인사동에서 개최되는 ‘옻빛전’이 활성화되어가는 걸 보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애착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전칠기의 매력을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emede.net ), 취재 곽은영 기자(kss@egihu.com), 촬영 김현진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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