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훈재]에이즈환자 차별 없는 세상을

  • 입력 2006년 5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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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이 ‘현대판 흑사병’ 또는 ‘성적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로 묘사되며 우리에게 알려진 지도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1980년대 유행 초기에 에이즈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감염 예방만이 최상이었고, 이미 에이즈에 걸린 사람의 생명과 인권은 사회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이후 20여 년 동안 에이즈의 원인과 전파 경로는 완벽히 규명됐다. 피 한 방울로 감염 여부를 20분 이내에 판별할 수 있는 진단 시약도 개발됐다. 바이러스의 증식을 효율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치료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에이즈를 완치할 수 있는 약의 개발도 그리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하더라도 주기적인 검진과 치료를 받는다면 20년 이상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치료 기술의 발전으로 외국에서는 이 병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태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에이즈는 고혈압, 당뇨병, 간염 등과 같이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도 생명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이웃집에 에이즈 환자가 살고 있다는 것은 이제 이색 화제가 아니며,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질병의 명칭만 인지하고 있지 실체에 대한 이해는 아주 부족하다. 아직도 ‘성적 타락’, ‘높은 전염력’, ‘죽음’ 등과 같은 1980년대식이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갖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걸맞지 않은 후진적 인식이다.

세계적으로 4000만 명 이상의 에이즈 감염인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학교, 직장 등에서 일상적인 신체접촉을 통해 감염된 경우는 없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전염병 중에서 전염력이 가장 낮은 군에 속한다. 에이즈 감염인과 성관계를 했다고 하더라도 콘돔을 사용했을 경우의 감염 확률은 0.02% 정도다. 의료인이 에이즈 감염인의 피를 뽑다가 주삿바늘에 찔리는 사고를 당했을 때의 감염 확률은 0.3%로 B형 간염 감염 확률의 100분의 1 수준이다. 미국프로농구 선수 매직 존슨이 에이즈에 걸린 후에도 농구코트를 다시 누볐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다수 에이즈 감염인의 외형과 신체활동도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간단치 않은 건강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들에게 국가와 사회가 따뜻이 배려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병에 걸린 사람이 그것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는다면 크게 잘못된 사회다. 필자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최근 그들의 인권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에이즈 감염인은 당뇨병 환자보다 다소 낮은 신체적 불편을 겪고 있지만 사회적 활동 수준은 당뇨병 환자의 절반 이하에 머물렀다. 사회적 차별이 문제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감염인에게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갖게 만든다. 어떤 이는 그 상황에 처한 자신을 자책하다가 오히려 사회적 규범이 허용하지 않는 일탈행위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에이즈 문제의 요체다.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격리가 필요하다는 일각의 주장은 과학적 타당성이 없다. 그러한 수단을 통해 에이즈 예방에 성공했다는 사례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들을 음지로 숨어들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에이즈 관리가 정말 불가능해져 현대판 흑사병이 될 수밖에 없으며, 감당해야 할 사회적 부담만이 커질 뿐이다. 결국 우리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이훈재 인하대 교수·사회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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