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론 100년 전문가 좌담회]"21세기는 양자공학시대"

  • 입력 2000년 10월 4일 18시 31분


《19일은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양자론의 상징인 플랑크 상수(h)를 도입한 논문을 발표한지 꼭 100년째 되는 날이다. 에너지가 플랑크 상수의 곱으로 표시되는 것처럼 자연이 불연속적인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사고에서 출발한 양자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더불어 20세기 최대의 지적 성과물로 꼽히고 있다.

동아사이언스는 국내의 석학 3인을 초청, 20세기 초반 천재 물리학자들이 숱한 지적 방황과 개념적 혼란을 극복하면서 완성했고, 지금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양자론의 전개과정과 그 의미를 짚어본다. 》

▼참석자▼

김정욱(金正旭) 고등과학원 원장(이론물리학), 임경순(任敬淳)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과학사), 장회익(張會翼)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과학철학)(이름 가나다 순)

사회:김두희(金斗熙) 동아사이언스 대표

장소:동아일보사옥 14층 회의실

일시:2000년 9월 29일 오전9:30∼11:30

▽김두희: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자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앞서 우선 ‘양자’라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회익:양자(quanta)란 불연속적인 물리량을 말합니다.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시세계에서는 에너지의 흐름을 비롯한 많은 물리현상이 불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익숙한 고전역학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죠. 뉴턴의 방정식에서는 모든 값이 연속적으로 변화하지 않습니까?

▽김정욱:그렇습니다. 고전역학은 흙으로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합니다. 필요에 따라서 적당량을 더하거나 뺄 수 있지요. 반면에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쪼갤 수 없는 벽돌로 집을 짓는 셈이지요. 따라서 창틀이나 문의 크기도 벽돌의 정수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두희:양자론의 등장을 전후한 당시의 과학계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김정욱:19세기 후반은 뉴턴의 고전역학이 완성된 시기입니다. 플랑크의 지도교수조차 그에게 “이제 물리학은 끝났다”며 다른 연구를 하도록 충고했을 정도였죠. 그러나 플랑크는 아주 꼼꼼한 사람이었고 또 매우 정직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찰결과를 두고 여러 각도에서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임경순:그 뒤 20대의 젊은 물리학자들이 이 대열에 대거 뛰어들게 됩니다.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 뒤에는 뭔가 심오한 이론이 있다는 공감대가 퍼져 나갔던 것이죠. 이들은 제 2의 뉴턴을 꿈꾸는 천재들이었습니다. 반면에 기성 과학자들은 자신의 토대를 스스로 부정할 용기가 없었죠.

▽김두희:당시 물리학계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일어난 셈이군요. 그런데 양자론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빛과 물질의 ‘파동―입자 이중성’인 것 같습니다. 물질이 이중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 발견됐습니까?

▽임경순:역사적으로 많은 물리학자가 빛의 실체를 밝히는 일에 뛰어들었죠. 뉴턴은 빛이 입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곧 회절이나 간섭처럼 빛을 파동으로 생각해야만 해결되는 현상이 관찰됐습니다. 결국 물리학자들은 관찰 방식에 따라 빛이 입자 또는 파동으로 보인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오랜 시행착오 끝에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1924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는 전자 같은 입자도 파동성을 갖는다는 ‘물질파이론’을 내놓게 됐습니다.

▽장회익:이를 바탕으로 1926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오늘날 물리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파동방정식’을 세우게 됩니다. 입자의 행동을 파동으로 기술하는 수식입니다. 양자가설이 양자역학으로 물리학의 역사에서 자리매김한 것이지요.

▽김정욱:사실 슈뢰딩거조차 자신이 만든 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결국 이듬해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이 파동방정식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물질이 어떤 지점에 존재할 확률은 그 지점의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지요. 아인슈타인은 끝내 이런 확률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른에게 보낸 편지속에 등장하는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도 바로 이런 의미이지요.

▽장회익:사실 양자론에 익숙한 물리학자조차 자신이 정말 이 이론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묻곤 합니다. 양자론의 핵심개념인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안한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조차 “사람이 정확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실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상의 위치를 정확히 서술하려고 하면 그 운동량을 모르고, 운동량을 정확히 서술하려면 위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불확정성입니다. 고전역학적인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김정욱:예를 들어 지금 저는 여기 앉아 있지만 제가 건넛방에서 발견될 확률도 있습니다. 물론 매우 작은 값이겠지만요. 실제로 원자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두희:우리의 존재가 확률적이라는 혼란스러운 이론을 굳이 일반인들이 알 필요가 있을까요?

▽임경순:양자론이 이론가들의 지적 유희라면 모르겠지만 오늘날 과학문명의 상당 부분이 양자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핵폭탄이나 핵발전소 등 막대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원자력기술을 비롯해서 분자의 구조분석을 통해 수많은 신물질을 만들어 내는 화학, 전자의 흐름을 조절해서 정보를 관리하는 반도체 등 수많은 분야가 양자론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죠. 양자론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겁니다.

▽김정욱:요즘 각광받는 분자생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학자였던 프란시스 크릭이 생명현상을 양자론적 관점에서 해석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생물학에 뛰어들어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함께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했으니까요. 한마디로 20세기는 양자혁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두희:양자론은 상대성이론보다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한데 왜 양자론은 1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일반인에게는 용어조차도 생소한 채 남아 있을까요?

▽김정욱:상대성이론에는 일반인의 관심을 끌 극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이라는 20세기 최고 천재의 개인 드라마가 있고, 부적절한 비유일망정 타임머신처럼 일반인에게 상대성이론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죠. 반면에 양자론은 부각시킬 만한 영웅이 없었고 이 이론의 성립에 관여한 물리학자 대부분이 양자론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리학자가 이럴진대 일반인에게까지 양자론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죠.

▽김두희:한편으로는 양자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시도도 없지않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프리쵸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같이 양자론을 동양철학에 빗대어 본다든지...

▽장회익:양자역학은 인과론적으로 꽉 짜인 고전역학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서구사상보다는 유연함을 갖고 있는 동양사상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론과 동양사상에 나타나는 개념들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곤란하지요. 외견상 비슷해 보이는 개념이라 하더라도 그 쓰이는 맥락이 전혀 다르니까요.

▽김두희:뉴턴의 역학이 새로운 세계관을 열었듯이 양자론 역시 인간의 사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까?

▽임경순:뉴턴의 역학은 당시 사람들에게 경탄의 대상이었습니다. 낙하운동이나 포탄의 궤적 을 정확히 예측했으니까요. 사람들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만 있으면 그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믿게 됐습니다. 반면 양자론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확실한 실체라고 믿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확률의 법칙을 따르는 불확실성에 기초한다는 점입니다.

▽장회익:양자론을 통해 사람들은 인식 주체가 대상의 상태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상의 상태는 관찰 전후에 불연속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식주체와 대상 사이의 새로운 인식론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김두희: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는 현실세계에, 하나는 미시세계에 독립적으로 적용하는 법칙인가요?

▽장회익: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한 근사적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세상처럼 원자나 분자가 아주 많아지면 양자역학의 수식은 고전역학의 수식에 아주 가까워집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원자의 세계와 비교할 때 불확실성이 매우 낮아지므로 모든 것이 확실해 보일 뿐입니다.

▽임경순:양자역학에 따른 현상을 우리 눈으로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항이 제로인 초전도 현상이나 극저온에서의 초유동체 현상은 고전역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죠. 일반인들이 이런 현상을 보면 당황하게 됩니다.

▽김두희:앞으로 양자론은 어떻게 발전해 나갈까요?

▽김정욱:주로 소립자물리학이나 고체물리학에서 적용되는 양자역학은 어느 정도 완성됐습니다만 상대성이론과 접목한 양자장이론이나 중력과의 통합을 모색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 등에 많은 과학자들이 매달리고 있습니다. 양자론은 앞으로도 양자적인 도약을 통해 계속 진화할 것입니다.

▽임경순:21세기는 양자공학의 시대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양자컴퓨터나 나노 테크놀로지 등 양자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응용연구가 한창입니다. 이제 양자론이 물리학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는 끝났다고 할까요?

▽김두희:한번의 좌담으로 양자론을 이해하겠다는 것은 욕심이겠군요. 어렵다고 외면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론적 토대를 인내심을 갖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장시간 말씀에 감사합니다.

<정리〓강석기동아사이언스기자>alchimiste@donga.com

▼양자론 이 책 참고하세요▼

양자론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은 국내에 번역돼 나온 아래의 책과 잡지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과학동아’ 10월호 특집, ‘자연을 해석하는 혁명적 언어 양자역학’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지식산업사), ‘양자역학이 사고전환을 가져온다’(윤당) △프리쵸프 카프라,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범양사) △스즈끼 타쿠지, ‘그림으로 배우는 양자역학’(한승) △도모나가 신이치로 ‘양자역학의 세계상’(전파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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