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기억 저편서 소환한 어린날의 소박한 맛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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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리고 그 비곗점과 밥알과 설핏 말린 국물과 부산의 사투리와, 그리고 국밥만 평생을 만 주인할머니의 앞치마를 함께 씹어 넘기는 것이다. 그것이 부산이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푸른숲·2012년)

나는 입덧이란 걸 믿지 않았다. 간절하게 먹고 싶던 무언가가 막상 식탁에 올라왔을 때 헛구역을 하는 그런 모습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장면인 줄 알았다.

그랬던 내가 초여름 지독하게 입덧을 했다. 몸은 분명 바닥에 누워 있는데 머리와 위장은 하루 종일 롤러코스터 위에 있는 듯 울렁거렸다. 생각나는 것들은 희한하게도 20년 넘게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기억 저편의 음식들이었다. 어린 날 주말이면 엄마가 튀겨서 하얀 종이 위에 소복소복 쌓아주던 감자 크로켓, 소금 친 계란 프라이 한 장 들어갔던 토스트 같은 것들. 몸이 원한 건지 마음이 원한 건지, 나는 망연히 누워서 대여섯 살의 아이처럼 그 접시들을 간절하게 떠올리곤 했다.

박찬일 셰프는 글 쓰는 요리사로 잘 알려져 있다. 합정에서, 조금 더 최근에는 광화문에서 만났던 그의 음식은 ‘엣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친근하다. 이색적인 메뉴라 해도 막상 나온 음식은 수더분하다. 그의 글도 다르지 않다. 멋 부리는 미식 기록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누구나 기억 속에 갖고 있는 따뜻한 밥상 하나를 불러내는 글이다.

책의 제목은 음식에 대한 그의 철학을 잘 드러낸다. 스무 살이 넘어 용산 미군부대에서 처음 진짜 레스토랑을 갔을 때 ‘말구유만 한 통에 담아주던 리필 콜라’의 충격이나, 민정당 시절 어느 남도 식당에서 노파가 끓여내던 게국지, 이런 것들을 그는 음식이라기보다 추억으로 써낸다. 그때그때의 장면에서 독자는 러닝셔츠 한 장 걸친 아이나 80년대의 가족, 시장통의 할매를 만나곤 한다.

입덧이 끝나고 더 이상 크로켓 생각이 나지 않게 됐지만 그 초여름의 간절함은 긴 여운을 남겼다. 판박이 메뉴판과 데일 듯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점심을 해결하는 도심에서, 기억 속 저편에 있는 소박한 어린 날의 맛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책이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도서#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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