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독 임란사 유감(讀壬亂史有感)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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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
독 임란사 유감(讀壬亂史有感) ―정소파(1912∼2013)

청사(靑史)에 길이! 두고 빛내일 자랑일레
도둑떼 몰고 쫓고 앞바단 피빛인데,
북울려 무찔러 가는 것! 눈에 선연하구나.

책장 갈피마다, 숨쉬는 임의 얼을
흐린 맘들 가다듬고 정성껏 읽어보라.
겨레의 흩깔린 넋을 바로 잡아 주리니.

임은 가고 나라 일은 뒤숭숭 어지러운데
갈리인 형제자매 서로 그려 애 태는 속
타카워… 그리는 정에, 길이 임만 부르니라.


여기 옷깃 여미고 “흐린 맘 가다듬어” 높이 우러를 역사가 있다. 오늘도 저 임진년 왜적들이 대한해협을 넘어와 온 나라를 뒤흔들던 그날을 떠올리게 나라 안팎이 자못 어지럽구나. 백성들 배부르고 평안함을 북돋아주어야 할 군신(君臣)이며 국가 수호의 장수들은 광화문 네거리를 지키고 서 계신 충무공 동상 앞을 아무 생각 없이 오고 가시는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은 시인이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0년 앞서 ‘협성회회보’에 신시 ‘고목가’를 발표했고 한시집 ‘우남시선’도 펴냈다. 정부 수립 2년 만에 불의의 남침에 부산까지 밀려갔던 우남은 휴전이 되고서도 “북진통일!”을 구호로 내세웠는데 1957년 개천절에 전국 시조, 한시 백일장을 열었다. 그해에 손수 내건 본선 시제가 ‘독 임란사 유감’이었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때 장원작이었다. 정소파는 1930년 ‘개벽’을 통해 등단했다가 195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 ‘설매사’로 당선한 데 이어 대통령이 주재하는 백일장에서 어사화까지 꽂게 되었다.

사직의 명운이 태풍 앞의 촛불처럼 깜빡일 때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은 1592년 5월 1일부터 전사한 1598년 10월 7일까지 군중일기를 썼는데 ‘난중일기’로 이름이 붙여진 것은 1795년(정조 19년)에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부터였다.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국보 76호)는 이순신의 친필 초본으로 그의 일상생활이며 친구, 친족들과의 관계며 수군 통제에 관한 전술과 비책 등 중요한 기록들이 쓰여 있다.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는 통일의 염원에 불타던 우남은 바로 저 임진왜란을 극복한 충무공 정신을 오늘에 되새겨 국난을 극복하자는 뜻에서 시제를 내걸었고 시인은 “임은 가고 나라 일은 뒤숭숭 어지러운데/갈리인 형제자매 서로 그려 애 태는 속/타카워… 그리는 정에, 길이 임만 부르니라” 화답하니 겨레의 가락 시조가 천둥처럼 울리는도다.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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