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미국은 소나무가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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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워싱턴에서 만난 미국인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겉으로는 대단히 친절하고 예의바르다. 어릴 때부터 ‘감사합니다(Thank you)’와 ‘실례합니다(Excuse me)’가 입에 밴 사람들이다.

동시에 계산이 정확하다. 친구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식사한 뒤에도 각자 지갑을 꺼내 밥값을 사람 수대로, 센트 단위까지 계산하는 게 일상화됐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의사 표현을 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편이다.

이런 미국인들의 특징이 떠오른 것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31일(현지 시간) 미 알래스카 주 앵커리지 북극 외교장관회담에서 만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에게 소나무 묘목이 담긴 사진을 전달했을 때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열병식(3일) 참석 같은 변수에도 한미 동맹은 상록수인 소나무처럼 변치 말자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이에 감사를 표한 케리 장관은 윤 장관에게 “박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외교부는 밝혔다. 한국 정부가 나름대로 성의를 보인 만큼 미 정부도 이번 방중을 수긍한 듯했다.

하지만 중국의 사상 최대 ‘군사 쇼’를 접한 미국의 표정은 ‘소나무 이벤트’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뉴욕타임스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인민해방군 30만 명 감축안에 대해 “동북아 군사적 긴장 완화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박 대통령이 미국의 우방 정상 중 유일하게 열병식에 참석해 중국에서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둥펑-31A) 등을 관람한 데 대해서도 매체 불문하고 비판 일색이다.

물론 박 대통령이 중국을 활용해 ‘북핵 해결 모멘텀’을 만들고 주요 2개국(G2)인 미중 사이에서 외교적 공간을 창출하려는 노력에 미국이 딴죽을 걸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이란 핵협상 등 다른 외교 현안 때문에 북핵 문제에 사실상 손놓고 있는 만큼 이번 일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문제는 이런 노력도 굳건한 한미동맹이 근간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대놓고 간과되고 있다는 분위기가 워싱턴에서 뚜렷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 상황에서 아직은 미국이 중국보다 한국 편이라는 사실은 북한의 8월 도발 과정에서 재확인됐는데도 말이다.

방중을 마친 박 대통령은 이제 다음 달 16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미국은 벌써부터 답을 기다릴 것이다. 중국과 가까이하면서 한미동맹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 말이다. 그러면서 동맹 유지비가 적힌 ‘계산서’를 들이밀 수도 있다. 다양한 목록이 가능할 것이다. 한미일 삼각 협력 강화를 위해 빨리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하라는 것일 수도 있고,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 건 같은 것도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워싱턴 외교가의 한 관계자는 “북한이 다음 달 10일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맞춰 미사일 발사라도 하면 그나마 북핵 문제를 놓고 한미 공조 강화라도 논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서로 서먹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거의 여왕’인 박 대통령에게 중국과의 협력 강화는 정치적으로 풀면 ‘표의 확장성’, 그러니까 산토끼(중국)까지 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집토끼인 미국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서는 소용없는 일이다. 집만 나서면 각양각색의 상록수가 지천인 미국인들에게 매일 보는 나무와 엇비슷한 사진 하나 주면서 “이것저것 계산 말고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한국 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이 통할 거라고 기대했다면 너무 안이하다. 박 대통령 취임 후 가장 어렵고 고차원의 외교 방정식이 필요한 정상회담이 40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ddr@donga.com
#미국#소나무#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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