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연적(硯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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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 잉어연적
조선백자 잉어연적
연적(硯滴) ―김상옥(1920∼2004)

손에 쥐고 왔다 다시 옮겨 쥐어준다.
그가 데운 온기, 내 살에 스미는 백자
이 희고 둥근 모양을 어따 도로 옮기나

흙이 불에 들어 한줌 뭉친 눈송이!
손과 손을 거쳐 오늘 여기 내온 모양
시시로 볼에 문질러 눈을 감고 찾는다.

눈에 묻은 때는 눈으로 씻어내고
마음 어린 그림자 마음으로 굽어보다
어드메 홈대를 지르고 다시 너를 채울까
흰옷의 백성들 하늘 받들어 그 몸과 마음을 희고 맑고 깨끗하게 살더니 저 신라토기, 고려청자를 넘어 마침내 세계 도자예술사를 새로 쓰는 조선백자를 구워냈구나. 흙을 고르고 물레로 자아 밥사발, 술병, 항아리, 등잔, 향로… 삶에 쓰이는 어느 것도 다 빚어내어 거기에 1300도 장작 불길을 머금어야 비로소 눈송이 같은, 누에고치 같은 순백의 살결로 태어나는 티 없이 눈부신 흰빛을 우주공간에 만들어냈어라.

그 몸뚱이에 청화 진사 철화 등으로 꽃 새 사슴 소나무 대나무… 궁중화원이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서 한껏 아름다움을 부풀리기도 하지만 백자는 역시 아무 덧칠도 하지 않은 순백의 경지에서 그 본색을 남김없이 뿜어내는 것, 이 땅의 시인들 다투어 그 칭송을 해왔거니와 아무래도 이 시대의 시인으로 백자 사랑에 있어 초정 김상옥(艸丁 金相沃)을 따를 이가 없다.

시, 서, 화 삼절(三絶)로도 불렸지만 오죽 백자에 목이 말랐으면 인사동 한복판에 ‘아자방’을 차리고 눈에 차는 한 점 한 점을 모았으랴. 연적(硯滴)은 지난날 붓 먹 벼루가 문방도구이던 때 벼루 옆에 놓여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던 용기이다. 어쩌면 여기 보이는 것 같은 잉어연적을 손과 볼에 문지르며 “흙이 불에 들어 한줌 뭉친 눈송이”에 “눈에 묻은 때는 눈으로 씻어내고”도 다 채울 수 없는 아득한 공허에 온몸이 저려온다. 옛 선비들은 과거급제를 등용(登龍)이라 일렀거니 스스로 한 마리 잉어가 되어 하늘로 튀어 오르는 이 몸짓에서 그 염원이 활짝 날개를 펴는 것을.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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