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핫’ 이태원, ‘쿨’ 해방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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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거리’ 문화경제학

새로 생긴 카페와 맛집이 모여 있는 서울 용산구 신흥로 해방촌. 해가 지면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기려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새로 생긴 카페와 맛집이 모여 있는 서울 용산구 신흥로 해방촌. 해가 지면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기려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금요일 오후 7시.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즐기려는 청춘들이 내린 곳은 용산구의 녹사평역. 2번 출구에서 미군부대 울타리를 따라 남산 방향으로 5분쯤 걸어 올라가면 차로 건너편에 경리단길 입구가 보인다. 여기서 한신아파트를 오른쪽에 끼고 5분쯤 더 올라가면 2차로 도로 양옆으로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곳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맛집과 멋진 카페가 몰려 있다고 입소문 나기 시작한 해방촌이다. 찾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이곳은 홍익대 앞이나 강남역 같은 ‘핫 플레이스(hot place)’가 아니다. 아는 사람만 알고, 가본 사람만 찾는다는 멋진 곳, 다시 말해 ‘쿨 플레이스(cool place)’다. 루마니아나 스위스 등 이국적 음식을 파는 식당과 마카롱, 과일주스 등을 파는 카페 40여 곳이 모여 있다.

해방촌은 얼마 전만 해도 외부인 출입이 거의 없는 조용한 동네였다. 광복 후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됐고, 1960년대 이후에는 서울로 상경한 이들이 봉제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곳이었다. 이후에는 미군 등 외국인들이 들어와 한국인과 함께 사는 독특한 주거공간으로 변했다.

왜 주민들만의 조용한 공간이었던 해방촌에 카페며 식당들이 들어와 둥지를 튼 걸까. 해방촌과 인근 이태원, 경리단길 사례를 통해 상권의 변화와 이동에 담긴 문화경제학적 의미를 살펴봤다.

▼ 이태원서 밀려난 소상인들, 옆동네 해방촌에 새둥지 ▼

금요일인 이달 10일 저녁에도 해방촌 상가 곳곳은 자유로움과 여유를 만끽하려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동네 초입에 있는 수제 햄버거 집 앞을 지나자 연기와 섞인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감자를 튀기는 고소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인근 주택가에 사는 외국인들이 상가 앞을 지나다 ‘이웃사촌’인 가게 주인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밤이 깊어 9시가 지나자 해방촌 상점가에는 좁은 2차로 도로에 쉴 새 없이 오가는 자동차 수만큼 사람이 많아졌다. 아이를 데리고 나와 타코(멕시코식 샌드위치)를 먹으며 저녁식사를 하는 뚱뚱한 30대 백인 부부, 기타 가방을 등에 메고 길가에 서서 샌드위치를 먹는 흑인 청년들, 친구들과 주문한 음식을 앞에 두고 깔깔거리며 셀카를 찍는 한국 여대생 무리까지, 해방촌을 즐기는 모습은 무척 다양했다.

외지인들이 해방촌에 다채로운 색을 더하기 시작한 건 불과 2∼3년 전이다. 당시만 해도 상가라고는 오래된 문방구나 치킨가게 정도가 전부였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기존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더니 젊은이들 취향의 카페나 수제 햄버거 집으로 간판을 바꿔달기 시작했다. 해방촌이 블로거들 사이에서 명소로 회자되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었다.

피자가게 ‘알마또’를 운영하는 김수만 씨(37)가 2011년 해방촌에 가게를 열 때만해도 새로 문을 연 음식점은 서너 곳에 불과했다. 그는 4년 전까지 이태원 중심가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주방장으로 일하다 해방촌에 피자가게를 열었다. 인근에 사는 외국인들이 단골이 돼 자주 식사를 하러 왔다. 이때부터 한국인이 장사하는 가게에 외국인 손님이 와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는 해방촌 특유의 분위기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조용했던 해방촌 상권에 개성이 생기며 ‘영혼’이 불어넣어지는 시기였다고 평한다.

김 씨가 이태원을 떠나 해방촌에 들어오기로 결심한 것은 이태원의 치솟는 임대료과 권리금 때문이었다. 2009년 무렵부터 이태원역에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속속 들어서고 상업화가 심화되기 시작하면서 목 좋은 곳에서 장사하던 수많은 영세 자영업자가 권리금을 떼인 채 쫓겨났다. 이태원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던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점차 사라져 갔고, 그 자리엔 화려한 프랜차이즈 숍들이 들어갔다. 상인들은 “그때는 자유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로 가득 했던 이태원 거리가 ‘영혼’을 잃어가는 시기였다”고 말한다.

이국적 분위기를 내던 소규모 상점들이 사라지고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자리 잡은 서울 용산구의 지하철 이태원역 주변.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국적 분위기를 내던 소규모 상점들이 사라지고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자리 잡은 서울 용산구의 지하철 이태원역 주변.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싼 임대료 찾아 ‘옆 동네’로

이후 지하철 한강진역 블루스퀘어에서 제일기획까지 이어지는 꼼데가르송길과 국군재정관리공단(경리단)에서 그랜드하얏트호텔까지인 경리단길도 ‘뜨는 동네’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금의 해방촌과 같은 여유로움이 가득했던 경리단길 역시 입소문이 나자 이태원화(化)되어 유동인구가 몰리게 됐다. 김 씨의 부인은 현재 경리단길에서 피자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가게의 월세는 최근 몇 년 사이 250만 원에서 750만 원으로 3배가 됐다.

김 씨는 이태원에 대기업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설 무렵 주방장으로 일했던 가게를 인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이태원보다 가게 임대료가 훨씬 저렴한 해방촌을 택했다.

이처럼 해방촌에 가게를 연 상인 중 상당수는 이태원에서 소규모 점포를 운영했던 이들이다. 외국 요리 전문점을 운영하거나 특색 있는 아이템으로 가게를 창업했던 이들은 이태원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해방촌으로 흘러들었다.

해방촌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지안 씨(35)는 “이태원에 유동인구가 더 많아 매출이 높지만 3배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는 힘들다”며 “해방촌에서는 쪼들리지 않고 여유롭게 장사할 수 있어 더 좋다”고 말했다.

해방촌에 오는 이들은 조용하면서도 이국적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다. 대학생 박세원 씨(28)는 “이태원에는 프랜차이즈 가게가 너무 많고 중국인 관광객들까지 몰려와 여유로운 느낌이 없다”며 “해방촌에선 사람 사는 느낌이 들고 독특한 맛집도 많아 좋다”고 말했다.

‘핫’해진 거리가 가져온 아이러니

하지만 해방촌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쿨(cool)’했던 해방촌이 ‘핫(hot)’해질 기미를 보이자 상인들의 걱정이 시작됐다. 우선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외국인 등 단골손님들이 떨어져 나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인은 “4명이서 와서 메뉴 하나만 시키고 한두 시간 동안 블로그에 올릴 사진만 찍고 가기도 한다”며 “사람만 북적이는 요즘 해방촌은 원래의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의 해방촌 맛집을 똑같이 따라한 ‘복제 가게’들이 생겨나는 것도 문제다. 상점이 40개 남짓한 상권에 최근 들어 비슷비슷한 카페가 10여 개나 생겼고, 수제 햄버거 집과 피자가게도 두세 곳 더 들어섰다.

해방촌을 찾는 사람이 늘자 상가 임대료도 들썩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알마또 사장 김 씨는 얼마 전 건물주인으로부터 월세를 100만 원에서 150만 원으로 올려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월세가 한 번에 50%나 오르는 것이지만 그 정도 임대료에 서울 하늘 아래서 장사할 곳을 찾기 힘들 거란 생각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상인들 사이에서는 경리단길과 인접해 유동인구가 많은 해방촌 입구에 대기업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김 씨는 “우리 같은 상인들은 화장품 로드숍이 들어서면 그 다음은 단지 시간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처럼 급변하는 분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은 상인들 외에도 많다. 이태원, 경리단길, 해방촌으로 이어지는 상권 확장으로 해방촌이 원래 갖고 있던 감성과 분위기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조용히 살아온 주민들도 불만이 크다. 밤마다 몰려오는 술 취한 젊은이들과 상가의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주민들이 용산구청에 넣는 민원은 한 주 주말에만 수십 건에 달한다.

잡지 ‘남산골 해방촌’의 발행인 배영욱 씨는 “해방촌이 2012년 용산구 예술마을로 지정되고, 녹지축사업 대상 지역에 포함되는 등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땅값이 바짝 오르곤 했다”며 “이제는 토박이들이 뿌리 내리고 사는 게 아니라 부재지주가 임대료 장사를 하는 형국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사는 해방촌의 분위기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라고 덧붙였다.
개성이 살아 있던 거리에 사람들이 몰리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간판의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들어와 원래의 매력을 지워버리곤 한다. 특유의 분위기를 잃고 획일화된 모습의 서울 가로수길, 인사동길, 홍익대 인근 상권(위쪽부터).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개성이 살아 있던 거리에 사람들이 몰리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간판의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들어와 원래의 매력을 지워버리곤 한다. 특유의 분위기를 잃고 획일화된 모습의 서울 가로수길, 인사동길, 홍익대 인근 상권(위쪽부터).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똑같은 주점에 똑같은 카페… ‘영혼’ 사라지는 거리 ▼

서울 인사동-삼청동-가로수길 등 대형 자본 몰려오며 상권 커졌지만
토박이들 밀려나 거리 문화 획일화… “영세업자 보호위한 인센티브 필요”

거리는 화려해졌지만 개성은 사라졌다.

서울 도심 곳곳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거대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서고 그로 인해 본래 색을 잃어버린 거리들이 있다. 홍익대 앞, 가로수길, 인사동길, 삼청동길이 그렇다. 자고 일어나면 몇 배씩 뛰는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영세 자영업자들이 변두리로 내쫓기는 현상은 어디서나 똑같이 반복돼왔다.

기존 상권이 만들어놓은 매력과 독특한 분위기는 무척 매력적이어서 자연스럽게 대규모 자본을 끌어들인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매력적인 상권을 만들었던 기존 자영업자들이 떠나고 거리가 획일화된다는 데 있다. 전문가들은 ‘최소한의 장벽’을 만들어 거리의 개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거리’ 살려야 도심 활력 유지

작은 상가들이 만들어온 ‘쿨 플레이스(Cool Place)’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거듭나고, 이 과정에서 상권이 커지고 임대료가 올라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현상을 그냥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형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상권이 커지는 것은 반길 만한 일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개성을 잃은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상권이 쇠퇴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도시공학)는 “대형 업체들이 속칭 ‘돈이 되는’ 상권에 뛰어들었다가 이익을 챙기고 난 뒤 빠져나가면 그 상권은 황폐화되고 만다”고 말했다.

영국과 독일은 1970, 80년대 도심 상권이 고도로 성장한 다음 쇠퇴해 공동화하는 과정을 겪었다. 상권이 교외로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기존 도심은 활력을 잃고 슬럼화했다. 이후 이 국가들은 구도심 재생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형 자본의 무차별적인 진출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용을 발생시킨다. 우선 상권이 커지기까지 소상인들이 기울여 온 유무형의 노력이 모두 헛것(매몰비용)이 된다. 또 거대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슬럼화 현상이 생기면 도심 재생을 위해 추가 비용이 든다.

이와 관련해 정창무 서울대 교수(건설환경공학)는 “도심이 활력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구멍가게들이 살아남는 ‘작은 거리’가 필요하다”며 “소형 점포를 살리는 것이 곧 도시를 살리는 것이라는 유럽 선진국의 경험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도 “상권이 지나치게 과열되지 않도록 하면서 문화적 공간으로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이나 독일처럼 지방자치단체들이 나서 상권 입점에 대한 세부조건을 정하거나 지구단위계획 등을 통해 상권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금기용 서울연구원 시민경제연구실 연구위원은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가로 상권(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상권)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며 “지방자치단체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여론 주목받을 때마다 임대료 ‘들썩’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때론 고유의 문화를 보호하겠다며 지자체가 특정 지역을 문화지구나 예술마을로 지정한 것이 오히려 거리의 획일화를 앞당기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인사동은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계승하기 위해 2002년 문화지구로 지정됐다. 하지만 종로구가 구체적인 지구 관리계획을 수립하는 1년간의 입법예고 기간에 문화지구 지정 후 적용될 규제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대규모 자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기간 건물주들은 리모델링과 재건축을 이유로 기존에 세 들어 있던 공방과 화랑을 내쫓았다.

인사전통문화보존회의 김병욱 사무국장은 “문화·예술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 관리구역으로 지정됐다는 소문이 나자 오히려 대형 자본의 침투가 가속화됐다”며 “2004년 문화지구로 지정된 대학로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영세 상인끼리 단결해 건물주에 대항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인사동 상가 번영회는 지난 10년 동안 임대료를 물가 상승률과 연동해 연 5∼10%만 올리는 등의 계약 내용을 건물주와 합의하려 했지만 이를 주도한 상인들이 인사동에서 쫓겨나며 상인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최소한의 장벽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원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실장은 “경쟁사회에서 거대 자본으로부터 영세 자영업자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면서도 “다만, 영세 자영업자를 입주시키는 건물주에게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를 주는 시스템을 만들어 어느 정도의 보호막을 갖추는 방안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고야 best@donga.com·권기범 기자
김리안 인턴기자 연세대 법학과 졸업
맹서현 인턴기자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국의 거리#문화경제학#이태원 소상인#해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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