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태평성시도 유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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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시도(부분)
태평성시도(부분)
깊은 산 후미진 골짜기나 안개 낀 강물이 가라앉은 색조로 그려진 조선시대 산수화를 보노라면 잊혀진 DNA의 감수성이 일깨워지는 듯 마음이 푸근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의 집은 벽에 둥근 창이 뚫려 있거나 처마 없이 직선으로 경사진 지붕이거나, 여하튼 우리 전통 양식의 집은 아니다.

낚시질을 하거나 탁족을 하는 선비는 뒤통수에만 머리칼이 남아 있는 대머리에 웃저고리는 다 풀어헤쳐 맨가슴이 드러나 있다. 풍로에서 차를 끓이는 동자는 우리 조선시대 사내아이의 땋은 머리가 아니라 머리 위로 좌우 대칭의 쪽을 얹어 마치 미키마우스의 귀를 연상시키는 중국의 동자(童子)상이다. 한마디로 중국의 산하, 중국의 집, 중국의 신선, 중국의 아이들이다.

하기는 조선조 500년간 줄기차게 그려진 우리의 전통 회화는 11세기 북송의 송적(宋迪)이 처음으로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남송 대(12세기) 주자가 노닐던 무이산(武夷山)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나대경(羅大經·12∼13세기)의 산거 생활을 그린 산정일장도(山靜日長圖), 도연명(陶淵明·4∼5세기)의 귀거래도(歸去來圖) 혹은 도화원기(桃花源記)뿐이다.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조선의 복식과 머리 스타일 그리고 가옥이 완전히 중국과 같아서 우리가 중국과 같은 나라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을 뻔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진경산수와 단원, 혜원의 풍속화가 있다고는 해도 작품의 크기가 작고 가짓수가 적으며, 후대에 사조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회화사의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화제(畵題)는 전원에서의 선비들의 풍류나 연애담에 한정되어 있고, 일상생활이라야 아이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거나, 미장이가 기왓장 올리는 장면 등 몇 점 되지 않는다. 보부상(褓負商)도 있었을 테고, 버들고리를 이고 다니는 방물장수 노파도 있었을 것이며, 종로에는 육의전(六矣廛)이 있었고, 지역마다 열리는 5일장에는 떠돌이 남사당패도 있었을 텐데, 당대 사람들의 경제 활동을 알 수 있는 그림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전통 문화에 대한 집단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이와 같은 회화의 빈약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도 그런 점에서 매우 실망스럽다. 화려한 건물을 배경으로 18세기 조선시대 도시의 다양한 삶이 적극적으로 부각되었다고 관련 학자들은 말한다. 여러 가지 물품을 파는 상점들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도시적 삶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거리에는 패루(牌樓)가 우뚝 솟아 있고, 건축물은 자를 사용해 반듯하게 그린 계화(界畵) 화법이며, 화면에 등장한 수많은 사람들의 옷과 머리 모양은 더도 덜도 없이 그대로 중국 사람들이다. 두루마리 그림에서 병풍으로 옮겼다는 형식상의 차이만 있을 뿐, 북송 시대와 명나라 대의 쑤저우 항저우 거리를 정밀하게 묘사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모사판이 아닌가.

우리의 전통 회화가 중국 그림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가 된 듯하다. 그래야만 진정 우리는 한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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