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내년 4월을 사회안전망 완성의 달로 만들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국무역협회와 코엑스가 13일 실시한 화재 대피훈련. 서울 강남구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서 직원들이 매뉴얼에 따라 지정된 장소로 대피하고 있다.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한국무역협회와 코엑스가 13일 실시한 화재 대피훈련. 서울 강남구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서 직원들이 매뉴얼에 따라 지정된 장소로 대피하고 있다.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4월 15일 오전 8시 52분 필자는 심장병 아기를 살리기 위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심장 바느질에 전념하고 있었다. 오후 8시 52분 주점에서 옛 학교 친구들과 만나 반가움에 싱거운 소리 하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친구가 있어 좋았고 그렇게 함께 곱게 늙어갈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했다. 그러나 이튿날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이게 웬일인가? 세상이 뒤집혔다. 예고도 없었고 놀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이제 더이상 바느질이 흥미롭지도 않고 사람들 만나는 것이 즐겁지도 않다. 이 무력감과 수치스러움은 언제나 끝이 날까?

온 세상을 휘감은 세월호와 관련된 수많은 슬픔과 억울함이 짧은 시간이지만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 와중에 참사를 악용하는 그룹에 대한 괘씸함과 질책들이 뒤엉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안전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해야 하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누군가는 냉정을 회복하고 뭘 해야 하는지, 뭐부터 해야 하는지 공론을 다듬을 때가 되었다.

그리하여 내년 2015년 4월 16일은 ‘국민 대통합성 고품격 사회안전망의 완성’을 온 세계에 공표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회안전망 구축은 구성원 간 이해관계가 대립될 이유도 없고 필수불가결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일 뿐 아니라 당할 만큼 당한 터이라 국민대통합의 으뜸 주제로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을까?

요즘 세월호 사후 수습과 안전 현황 점검이 고개를 드는 것 같으나 근본적으로 국민적 차원에서의 대변혁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아 아쉽다. 일개 외과의사이긴 하지만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의료계의 일원으로서 국민과 함께 미래 안전선진국을 설계하는 데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기도 해서 ‘앞으로’에 대해 몇 자 적고 싶다.

우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안전관리시스템을 창조하는 것으로 국가 안전 목표를 바꾸자. 미국의 9·11을 벤치마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를 위해 취약그룹(달동네 화재), 위험그룹(실험실 휘발성 시약), 대형 참사그룹(탄광 사고, 해상 사고, 지하철 사고), 응급그룹(중환자, 낙상 환자) 등 사고 날 확률이 높은 분야부터 발굴하자(톱 20 분야만 골라내도 반은 성공할 것 같다).

모든 결정은 상의하달(top-down)이 아닌 하의상달(bottom-up) 방식으로 접근하자. 현장의 목소리와 현장의 대안을 모아야 답이 나온다. 용처도 불확실한 예산부터 증액하지 말고 어떻게 바꿀지 먼저 살펴보고 합격한 그룹부터 소요예산을 할애하자.

둘째, 기존의 안전시스템 중 쓸 만한 것은 골라내어 서로 배울 건 배우고 키울 건 키우자. 여기에는 응급의료전달체계, 병원 안전시스템, 전염병 대처 등이 참고가 될 것이다.

셋째, ‘국가통합안전소통망’을 새로 구축하자. 언제 어디서나 소통 가능하고 소통이 곧 위치 파악이 되게 하되 사고를 당한 사람 입장에서 만들자. 수많은 응급신고번호는 평소에 외우지도 않을 뿐 아니라 급할 때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이번 사고 때에도 해난구급전화가 있었지만 학생들은 119로 신고했다는 것 아닌가. 전화번호 하나나 두 개만 외우도록 만들자. 예를 들자면 8282 같은 번호는 ‘빨리빨리’ 그야말로 우리 민족성도 드러내고 급한 걸 표현해 주기도 하는 한국형 응급호출 번호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국민들이 일단 국가통합안전소통망에 접속하면 분류 전문가나 분류시스템이 자동적으로 해당 분야로 연결을 유도하고 위치와 신상명세 정도는 자동으로 기록되게 하여 기본 질문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즉시 사연 접수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자. 위치 정보를 바탕으로 주변 폐쇄회로(CCTV까지 찾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장난 전화를 걱정하는데 일단 모두 접수하고 대응한 후 가혹한 불이익을 나중에 조용히 주면 된다. 사고 당한 사람의 단말기는 휴대전화가 가장 많을 것이다. ‘원터치 사고신고’ 앱이 휴대전화 출고 때부터 장착되어 위치가 자동 추적되도록 하면 어떨까? 그리고 재난 준비가 필요한 현장에 구명정을 준비하듯 휴대전화와 배터리, 충전기 준비까지 필수화해야 한다. 더 필요한 준비물이 있다면 계속 발굴하자.

넷째, 좀 더 지혜로운 훈련 매뉴얼을 만들되 규모를 축소하여 중간 책임자 지휘하에 숙지가 될 수 있도록 자율적으로 시행하자. 얼마 전 모 대형빌딩 대피훈련 참여율과 집중도를 보라. 이런 훈련을 할 때 고층에 근무하는 직원만 시범으로 먼저 하고 이를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들이 있었다면 훨씬 내실 있는 훈련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다섯째, 그날(!)들을 잊지 않고 훈련할 수 있는 교육과 기억의 장이 필요할 것 같다. 생존자 힐링 프로그램 실시와 토론의 공간 역할도 함께 하면 좋겠다.

여섯째, 분야별로 국제 인증 안전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을 갖추자. 초기에 안전선진국에 연수를 보내고 자격증을 획득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일곱째, 장비와 기술의 선진화를 위해 전투기 구매 예산 확보하듯이 안전장비 구매 예산을 마련하자. 평소에 구조장비와 구조기술의 소재 파악과 정기적 작동점검을 의무화하고 위반할 경우 불이익을 강화하자. 이번 참사의 해결 기술이나 해결 장비는 아직도 아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이제 너무 슬퍼만 하지 말자. 내년 2015년 4월 16일에는 우리가 함께 ‘창조’한 ‘안전선진국’의 모습에 후회가 없도록 하는 준비를 시작하자.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세월호#화재 대피훈련#사후 수습#안전 현황 점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