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 “예언자들은 다 과격파야, 막 두들기라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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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0>1971년 10·5원주시위

‘오적’ 필화사건으로 유명해진 김지하는 떠들썩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지학순 주교(오른쪽)와 만난다. 지 주교로부터 성체를 받는 모습. 김지하 제공
‘오적’ 필화사건으로 유명해진 김지하는 떠들썩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지학순 주교(오른쪽)와 만난다. 지 주교로부터 성체를 받는 모습. 김지하 제공
1971년 8월 23일 경기 옹진군 용유면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특수부대원들이 서울로 진입해 군경과 교전한 ‘실미도’ 사건이 터졌다. 요즘 신문과 방송에도 북파공작원들의 후일담들이 공개되고 있지만 실미도 사건은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래혁 국방부 장관이 물러난다.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김지하는 원주에서 가톨릭을 발판으로 한 장기적 사회운동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뜻밖의 일이 터진다. 원주문화방송의 방만 부실운영이었다.

원주문화방송은 1969년 원주교구가 1700만 원, 5·16장학회가 1300만 원을 출연해 출범했는데 운영권은 거꾸로 5·16장학회가 6 대 4로 원주교구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지학순 주교가 시정을 요구했지만 관계자들은 도리어 방송국 주식을 총회 의결조차 없이 팔아버린다. 지 주교는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부패했으며 얼마나 횡포를 부리고 있는지 뼈저리게 체험했다. 가톨릭 주교인 내가 이렇게 당하는데 서민들은 오죽하겠는가. 억울한 서민들을 대표해 교회가 일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했다. D데이는 1971년 추석날로 잡았다.

지 주교는 추석 미사를 집전하면서 원주문화방송 사례를 들며 “우리 사회가 썩어 있다”고 개탄했다. 1971년 가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원주시위’의 신호탄이었다. 김지하가 지휘부를 구성했다. 사제관에 틀어박혀 정보를 수집하고 중요한 판단이나 문건, 스케줄 변동이나 우발적인 일 등에 대처하는 통제탑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학생운동 사회운동 전반을 지휘하고 조율하던 조영래와 긴밀히 협의했다.

1969년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공부하는 와중에도 전태일 장례식 등 민주화투쟁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조영래는 마침내 1971년 3월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어 차례 원주를 찾아 김지하 등과 의논하며 ‘원주시위’를 서울 학생운동과 기독교 신·구교 및 언론계, 재야 지도자층과 연결했던 것이다.

김지하의 말이다.

“시위 당일 읽을 선언문을 써놓고 좀 걱정이 되어 지 주교님에게 ‘종교 문건으로 너무 과격하지 않은가요’ 여쭈었다. 웬걸, 지 주교는 오히려 ‘옛날 예언자들이 모두 과격파들이야! 막 두들기라고! 그래야 정신이 번쩍 들지!’ 하는 것 아닌가(웃음).”

김지하의 원주시위 선언문은 조영래를 통해 동아일보 천관우 이사에게 전달되었고 이후 박형규 목사, 박홍 신부, 학생운동 지도부, 외신에까지 전달되었다.

마침내 1971년 10월 5일 2000여 신도들이 원주교구 성당 마당에 모였다. 보수적인 종교계 내에서, 그것도 가톨릭 신부들이 앞장서고 시골 할머니 2000∼3000명이 모여 정부의 실정(失政)과 반민주적 철권 정치, 부패 스캔들을 공격하고 나섰으니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인 10월 6일자로 ‘원주시위’를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다시 김지하의 회고’다.

“시위가 벌어진 사흘 동안 한국의 종교계 민주화운동 세력, 학생운동 세력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밤마다 횃불이 켜졌고 사제관 전화통에 불이 났다. 그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정세의 큰 물줄기가 바뀌고 있음을 직감했다.”

원주시위 소식은 일본으로, 유럽으로,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원주문화방송이 사과함으로써 일단 마무리되지만 당시 투쟁을 계기로 원주교구는 10여 년에 걸쳐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메카 중 하나가 된다.

원주는 본래 저항의 도시였다. 동학운동,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전쟁에서부터 시작해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거쳐 1990년대 시민단체의 다방면에 걸친 운동까지 권력에 정면 대응한 도시였다. 연세대 대학언론사인 ‘연세춘추’ 2000년 6월 5일자는 원주를 소개하며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 36년 이 지역 역사를 살펴보면 유난히 의병 활동이라든지 반일 단체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원주에는 연세대 원주캠퍼스가 있다).

민주인사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76년 1월에는 가톨릭계와 개신교가 함께 군사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원주선언’이 나와 그해 3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주구국선언’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 원주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

1965년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그는 로마 유학 시절, 가톨릭의 사회참여를 선언한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운영을 통해 배운 점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다. 교구 내 광산노동자와 농민들의 참상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신용협동조합 운동, 수재민구호활동 등도 열정적으로 벌였다. 지 주교는 민청학련(1974년)에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단체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결성으로 이어진다.

‘원주시위’가 벌어진 10월 5일, 서울에서는 불에 기름을 붓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새벽 1시반 수도경비사령부 제5헌병대 소속 무장군인 30여 명이 군 트럭 3대와 지프 1대에 나눠 타고 고려대 정문 수위로부터 학생회관 열쇠를 빼앗아 4층 휴게실에 있던 학생 5명을 연행한 것이다. 이른바 ‘고려대 무장군인 난입사건’이었다.

7일 고려대생들이 들고일어났다. 학생들은 김상협 고려대 총장의 강력 항의로 풀려나지만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10월 8일 민관식 문교부 장관까지 나서 유재흥 국방부 장관에게 항의서를 전달하고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전국 모든 대학에서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어떻게 번질지 모르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마침내 10월 15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떨어졌다.

무장 군인들이 각 대학에 투입됐고 두 차례에 걸쳐 대학가에 휴업령이 내려졌다.

시위 주동자들에 대한 연행과 수배가 시작됐다. 10월 20일 현재 23개 대학, 학생 177명이 제적됐다.

김지하도 더이상 원주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10월 어느 날, 수녀가 모는 지프 뒷자리에 숨어 성당을 몰래 빠져나왔다. 그리고 원주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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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주교#원주시위#원주문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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