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76>물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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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황동규(1938∼)

버스 타고 가다 방파제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조그만 어촌에서 슬쩍 내렸다.

바다로 나가는 길은 대개 싱겁게 시작되지만

추억이 어수선했던가,

길머리를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댔다.

삼십 년쯤 됐을까, 무작정 바닷가를 거닐다 만난 술집

튕겨진 문 틈서리에 새들이 둥지를 튼

낡은 해신당 아래 있었다.

저쯤이었나?

나무판자에 유리도 없이 뚫어논 사각(四角) 창에

섬 하나 떠 있고

섬 뒤로 짧고 분명했던 수평선과 식힌 소주

생선 맨살과 주모의 낮은 말소리

그리고 아 물소리가 좋았다.

바다의 감각이 몸부림치며 바위에 몸을 던져

몸부림을 터는,

터는 듯 다시 몸을 던지는 소리.

다른 아무것도 안에 들이지 않고

저물던 바다의 실루엣,

원근 따로 없이 모두 한가지로 저물었다.

바로 이쯤이었지?

술집 사라지고 해신당 걷히고

나무 쪼가리 하나 보이지 않는 바위 사이로

물소리만 철썩이고 있었다.

머뭇거리자 부근 어디에 사는 물샌가

보이지는 않지만 꽤 똑똑한 소리로 끼룩댔다.

더는 없어.

‘더 물소리’는 없어.

바닷가 해신당 밑 조그만 술집, 호젓이 혼자 앉아 회 접시 앞에 놓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켠다. 철썩철썩 파도소리. 고개를 돌리면 유리창도 아니고, 바다 공기에 전 판자벽에 그냥 뻥 뚫어놓은 네모 구멍, 그 너머로 ‘섬 하나 떠 있고/섬 뒤로 짧고’ 선명한 수평선 그어진 바다. 카, 진정한 술꾼들의 로망이겠네! 술꾼 최대의 행복은 이런 순간에 있으리. 꿈결처럼 ‘원근 따로 없이’ 시인은 술과 바다와 한 몸으로 섞여든다. ‘몸부림치며 바위에 몸을 던져/몸부림을 터는,/터는 듯 다시 몸을 던지는’ 물소리라니! 바다의 관능, 물과 물소리의 섹슈얼함을 생생하게 낚아채는 시인의 놀라운 감각! 그런데 이 모두가 추억. 삼십 년 전의 일. 이제 ‘더는 없’단다. ‘더 물소리는 없’단다! 황동규 선생님은 로맨티시스트다. 로맨티시스트가 아니라면 삼십 년이 넘게 어찌 즐겨 혼자 여행하고 혼자 바닷가를 거닐고 혼자 술집에 드시겠는가?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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