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62년만에 부모님께 절 올립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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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설 앞두고 쪽방촌 합동차례 마련
전쟁고아 70대 “이렇게라도 찾아봬 다행”

최기남 씨(72)는 차례상 앞에서 털모자를 벗더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연신 매만졌다. ‘60여 년 만의 재회’가 가슴 설레는 듯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고는 절을 하려 몸을 굽혔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40년간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며 혹사당한 다리는 관절염에 걸려 제대로 굽혀지지 않았다. 힘겹게 다리를 떨며 두 번 절을 했다. 최 씨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폭격으로 잃은 부모님에게 62년 만에 올리는 절이었다. 부모님을 향해 지낸 첫 제사였다.

설(10일)을 이틀 앞둔 8일 오전. 3.3m²(1평) 남짓한 쪽방 900여 개가 몰려 있는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 상담소(푸른나눔터) 지하에서는 대부분이 노인인 쪽방촌 주민들이 모여 공동 차례를 지냈다. 일부 단체가 쪽방촌 일대 공원에서 떡국을 무료로 배급하면서 그 주변에 차례상을 차린 적은 있지만 실내에 제대로 된 상을 차리고 차례를 지낸 건 서울시가 주관한 이번 행사가 처음이다.

최 씨는 “남들이 다 지내는 차례지만 내게는 사치였다”라고 했다. 그는 9세 때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됐다. 그 후 60여 년을 넝마주이, 구두미화원 등을 하며 어렵게 생활했다. 차례를 지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고생 끝에 그가 얻은 건 당뇨와 관절염이었다. 병을 치료하느라 그나마 모은 돈까지 모두 썼다. 결국 2005년 전세방에서 월세 15만 원짜리 쪽방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는 “사는 게 힘에 부쳐 부모 한번 못 기리고 살았다”며 “부모님 얼굴을 완전히 잊어버리기 전에 이렇게라도 절을 올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쪽방촌 반장인 김두찬 씨(58)는 먼저 떠난 부인과 아들을 위해 절을 올렸다. 그는 이발소와 식당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1997년 경기 수원에 작은 식당을 냈다. 잘살아보겠다는 꿈에 부푼 것도 잠시, 같은 해 식당에서 발생한 화재는 부인과 아들을 앗아갔다. 그는 “모든 걸 잃은 뒤 쪽방을 전전하며 살면서 가족 제사 한번 지내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먹였다. 공옥천 씨(66)는 떨리는 손으로 차례주를 올린 뒤 부모와 대화라도 하는 듯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쪽방촌 주민 70여 명이 차례로 행사장을 찾았다. 대부분 혈혈단신인 그들은 자신의 방 크기만 한 차례상 앞에서 먼저 간 부모와 가족을 기렸다. 비록 작은 행사였지만 그들에게는 가슴 따뜻한 차례상이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이지윤 인턴기자 서강대 중국문화과 4학년  
#쪽방촌#공동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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