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헌진]시진핑의 배짱과 북한의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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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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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진 베이징특파원
이헌진 베이징특파원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은 배짱이 두둑했다. 1978년 12월 개혁 개방 선언과 미국과의 수교, 이듬해 1월 역사적인 미국 방문, 2월 베트남과의 전쟁. 하나하나가 세계를 흔든 초대형 사건이지만 덩은 3개월 사이에 모두 해치웠다. 그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시위가 발생하자 탱크까지 동원해 비무장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한다. 자신이 확신만 서면 주저하지 않고 큰 희생도 감수한다.

1992년 동아시아의 냉전 구도에 큰 변화를 불러온 한국과의 수교도 이런 배짱의 산물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毛澤東)과 혁명 동지인 북한 김일성에게 극진했다. 김일성이 언젠가 중국을 방문하자 베이징(北京) 역에서 그를 맞이하고 환영 연회 및 회담, 시찰 등 모든 일정을 동행했다. 북한도 4차례나 방문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외국 방문지도 북한이다.

1975년 4월 암 투병 중이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베이징 305병원에서 김일성을 마지막으로 만난다. 저우 총리는 김일성에게 배석한 덩샤오핑을 가리키며 “무슨 일이 있으면 덩샤오핑을 찾으라”라고 말했다. 아끼는 후계자에게 혈맹(血盟) 북한을 특별히 당부한 것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기대를 저버렸다. 그는 철저한 실용주의에 입각해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에 적극 호응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한중 수교는 극비리에 번개처럼 진행됐다. 덩샤오핑은 한국에 온 적도, 평생 한국인을 만나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는 것은 중국의 통일에 좋고, 중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무해양득(無害兩得)’을 내세웠다. 김일성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덩샤오핑의 배짱과 정확한 현실 인식 앞에서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의 사표(師表)는 덩샤오핑이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을 철저하게 따를 것을 다짐한다. 취임 후 첫 지방 시찰로 개혁 개방의 첫 문을 연 광둥(廣東) 성을 찾아 그의 동상에 헌화했다. 말과 행동으로 실용주의 노선을 강화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중화권 언론과 학자들은 시 총서기가 온화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지만 기개가 넘치고 배짱이 있다고 말한다. 시진핑 시대는 현상 유지에 집착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도 나오는 후진타오(胡錦濤) 시대와 다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2009년 서방의 중국 인권 비판에 대해 “배부르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거칠지만 단호하게 대응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23일 시 총서기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보낸 특사단을 만나 “한반도 비핵화와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가 한반도 평화 안정에 필수 요건”이라며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북한을 행여 자극할 수 있는 말이라면 공개적으로 일절 하지 않은 후진타오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북한은 시 총서기의 경고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 날인 24일 제3차 핵실험 진행 계획과 6자회담 ‘사멸’을 선언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국가적 중대 조치를 결심했다”라고 하는 등 위협 발언도 이어졌다.

북한이 중국 길들이기를 점점 노골화해 시 총서기의 대북 정책은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해 홍콩의 한 정치학자는 “시 총서기가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끌려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배짱이 두둑한 시진핑이 실용주의 노선으로 덩샤오핑처럼 중국의 한반도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헌진 베이징특파원 mungchii@donga.com
#시진핑#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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