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그녀가 눈뜨면, 얻고 잃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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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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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몰리 스위니’ ★★★★

‘몰리 스위니’는 3명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펼치는 37개의 독백 장면으로만 구성한 독특한 형식의 연극이다. 주인공 몰리 역을 맡은 예수정 씨가 독백을 하고 있다. 극단 유랑선 제공
‘몰리 스위니’는 3명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펼치는 37개의 독백 장면으로만 구성한 독특한 형식의 연극이다. 주인공 몰리 역을 맡은 예수정 씨가 독백을 하고 있다. 극단 유랑선 제공
어떤 연극은 외면과 속살이 다르다. 그래서 무심코 연극을 보러 왔다가 어리둥절해지는 경우가 있다. 3∼9일 서울 대학로 눈빛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몰리 스위니’(송선호 연출)가 그런 작품이었다.

홍보자료에는 아일랜드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 원작의 이 연극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슬픈 역사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공연에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식민주의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한 시골마을을 무대로 몰리 스위니라는 눈먼 여인이 불혹을 넘긴 나이에 개안(開眼)수술을 받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등장인물은 세 명. 생후 10개월 이후 시력을 천천히 잃어갔지만 다른 감각들이 발달된 중년 여인 몰리(예수정). 세계적 명성을 지닌 안과 의사였지만 동료에게 아내를 뺏긴 뒤 시골 병원 의사로 전락한 닥터 라이스(최창우), 마음속 충동이 이끄는 대로 돈키호테처럼 살아온 몰리의 남편 프랭크(이명호).

배우는 셋이지만 그들은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 세 개의 분할된 공간을 차지한 채 다큐멘터리 카메라 앞에서 말하듯 독백을 펼친다. 세 명이 돌아가면서 펼치는 독백 장면은 모두 37개. 무대 양옆에 자리 잡은 스태프들은 이를 소리와 영상으로 기록하며 때때로 무대 뒤 영사막에 독백 중인 배우를 근접 촬영한 영상을 비춘다.

그들 독백의 중심사건은 몰리의 개안수술이다. 삶에 서투른 프랭크는 시력 없이도 당당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한다. 그 무언가는 어쩌면 이제 몰리에겐 필요 없는 시력으로 결정된다. 달뜬 프랭크의 손에 끌려온 몰리를 만난 라이스는 시력의 회복이 몰리의 조화로운 세계를 망가뜨릴 수 있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수술이 성공하면 지난 1000년간 스무 명에게만 허락된 기적이 되고 그와 함께 의사로서 자신의 이력도 부활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렇다면 몰리는?

몰리는 두렵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세계에 입장하는 대신 자신이 살아온 세계에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하지만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겠다는 프랭크의 열정과 자신에게서 삶의 전환점을 찾으려는 라이스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다. 그는 시각의 세계로 잠시 소풍을 다녀온다는 심정으로 수술을 결심한다.

세 배우의 파편적 독백으로 이야기가 구성되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탓에 처음엔 몰입이 힘들다. 하지만 그 독백 속에 세 사람의 외로운 인생사가 퍼즐처럼 맞춰져 가면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그들의 표정을 통해 예감된 불길함이 서서히 현실이 되며 조여드는 극작술은 후반부에 빛을 발했다. 차분한 예수정, 싸늘한 최창우, 능란한 이명호. 세 배우의 제각각의 화술 역시 초반의 불협화음을 씻고 후반부에 갈수록 조화를 이뤄냈다. 그것은 마치 3개의 모노드라마로 이뤄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마치 실화를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한 것 같은 이 연극은 중층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첫째는 ‘보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다. 영어로 ‘나는 본다’에 해당하는 ‘I see’는 곧잘 ‘나는 안다’에 해당하는 ‘I know’와 등치된다. 하지만 몰리의 경우처럼 시각에 의존하지 않는 또 다른 앎이 가능하며 오히려 그것이 더 총체적 앎에 가까울 수 있다. 둘째는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했지만 심장을 잃은 계몽주의(라이스)와 충동과 영감에 충실한 낭만주의(프랭크)에 의해 파괴된 직관과 자연의 세계(몰리)에 대한 서구의 죄의식이다. 셋째는 영국 제국주의(라이스)와 그 아류인 아일랜드 민족주의(프랭크)에 의해 파괴된 아일랜드적 순수함(몰리)에 대한 향수다. 그 형식에서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이 작품이 세 가지 색실로 짠 태피스트리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망연자실#연극#몰리스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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