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단거리패의 첫 미국 희곡… 첫술에 배부르다

  • Array
  • 입력 2012년 9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테네시 윌리엄스의 원작을 압축한 채윤일 연출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배우들은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오가는 연기로 존재감을 뿜어낸다. 블랑시 역의 김소희(오른쪽)와 그를 연모하는 미치 역의 강호석. 연희단거리패 제공
테네시 윌리엄스의 원작을 압축한 채윤일 연출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배우들은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오가는 연기로 존재감을 뿜어낸다. 블랑시 역의 김소희(오른쪽)와 그를 연모하는 미치 역의 강호석. 연희단거리패 제공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대중에게 비비언 리와 말런 브랜도의 영화로 각인돼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이 작품은 희곡으로 쓰여 1947년 브로드웨이 초연작이 855회나 공연되는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연출가 엘리아 카잔이 이를 1951년 영화로 찍으면서 주요 배역을 연극 출연진 그대로 가져오면서 여주인공 블랑시 역만 제시카 탠디에서 비비언 리로 바꿨다. 같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를 통해 비비언 리가 구축한 이미지와 명성을 끌어오기 위해서였다.

연기 측면에서 영화는 연극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다. 연극은 토니상에서 여우주연상만 받았지만 영화는 아카데미 4개 연기상 중에 여우주연과 남녀조연까지 3개를 휩쓸었다. 뜻밖에도 블랑시의 맞수 스탠리로 숨 막히는 ‘짐승남’ 연기를 펼친 말런 브랜도는 연극과 영화에서 모두 상을 못 받았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1955년 초연된 이후 수없이 무대화됐다. 기자는 2010년 배종옥 이석준 주연으로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작품만 봤다. 블랑시와 스탠리 사이의 팽팽한 전율을 느낄 수 없었다. 영화와 연극 사이의 간극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연출가 채윤일이 연희단거리패 배우들과 무대화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면서 영화를 봤을 때의 전율을 체감했다. 연희단거리패의 대표배우 김소희와 이승헌이 연기한 블랑시와 스탠리는 공연 내내 팽팽한 긴장감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분명 말런 브랜도와 비비언 리가 보여준 사실적 연기와는 다르다. 섬세한 연기를 펼칠 때는 한없이 사실적이다. 스탠리의 위스키를 훔쳐 마실 때 블랑시의 떨리는 손가락에 흐르는 불안과 블랑시의 경멸 어린 조롱을 문틈으로 엿듣고 뒤돌아서는 스탠리의 등짝에 맴도는 분노를 그려낼 때가 그러하다.

하지만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과 감춰뒀던 비밀을 표출할 때는 사실성의 허물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비현실적인 광대기질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꿈’(벨 리브)이란 대저택에 살던 ‘하얀 숲’(블랑시 뒤부아란 이름의 본뜻)의 환상에 젖은 김소희는 사실적 톤으로 ‘우아한 속물’을 연기한다. 그러나 환상으로 시작해 환멸로 끝난 결혼의 실패 이후 욕망의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암거미’(타란툴라)로 돌변할 때 그는 눈물로 젖은 마스카라로 검댕 칠을 한 채 그리스 비극 톤으로 연기한다.

이승헌은 그 주변을 돌면서 추억과 환상의 비눗방울을 욕망과 광기의 흙탕물로 둔갑시키는 마성의 연기를 펼친다. 말런 브랜도를 연기하는 알 파치노를 보는 느낌이었다.

블랑시의 여동생이자 스탠리의 아내 스텔라 역을 맡은 김하영과, 블랑시에 대한 연모가 환멸로 바뀌는 미치 역의 강호석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김하영의 스텔라는 욕망의 문법에 충실한 기존의 스텔라와 달리 마지막엔 그것을 거부하는 예민한 존재로 그려진다. 강호석의 미치 역시 기존 마마보이의 틀을 깨고 스탠리에 맞먹는 남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앙상블 연기자들의 피아노와 색소폰 라이브 연주를 가미한 재즈 선율도 고급스럽다.

욕망(에로스)과 죽음(타나토스)의 문제에 천착해온 연출가 채윤일의 스타일에 부합하는 이 작품이 연희단거리패가 무대화한 첫 미국 희곡이란다. ‘첫술에 배부른 경우도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김소희와 이승헌에 필적할 블랑시와 스탠리를 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까’라는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 : i : : 10월 1일까지 서울 대학로 눈빛극장. 1만5000∼3만 원. 02-763-1268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망연자실#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연극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