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아름답고 심오해” 호주서도 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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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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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여행자 ‘페르 귄트’ ★★★★

난해하기로 유명한 입센의 ‘페르 귄트’도 호주에서 통했다.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첫 해외공연에 나선 극단 여행자의 ‘페르 귄트’는 첫날 객석의 70%만 찼지만 둘째 날 80%, 셋째 날 90%를 채우는 저력을 보였다. 주인공 페르(정해균)가 기저귀를 차고 고글을 낀 현대적 트롤족과 대면하는 기발한 장면에 호주 관객들도 탄성과 웃음을 터뜨렸다. 극단 여행자 제공
난해하기로 유명한 입센의 ‘페르 귄트’도 호주에서 통했다.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첫 해외공연에 나선 극단 여행자의 ‘페르 귄트’는 첫날 객석의 70%만 찼지만 둘째 날 80%, 셋째 날 90%를 채우는 저력을 보였다. 주인공 페르(정해균)가 기저귀를 차고 고글을 낀 현대적 트롤족과 대면하는 기발한 장면에 호주 관객들도 탄성과 웃음을 터뜨렸다. 극단 여행자 제공
3년 전에 비해 단단해졌다. 초연될 때만 해도 어딘가 성긴 구석이 엿보였던 극단 여행자의 ‘페르 귄트’(양정웅 재구성·연출)가 배우들의 능란한 화술과 숙련된 앙상블로 외국에서도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방대한 원작을 응축하면서 이를 현대적 무대와 비주얼로 풀어낸 이 작품에 대해 호주 관객의 반응은 ‘심오하면서도 아름답다’로 모아졌다.

2009년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과 연출상, 무대미술상을 수상한 여행자의 ‘페르 귄트’는 다음 달 LG아트센터 앙코르 공연을 앞두고 첫 해외공연에 나섰다. 19∼21일 호주 애들레이드의 600석 규모의 던스턴 플레이하우스 극장. 애들레이드에서 매년 열리는 오즈 아시아 페스티벌 초청공연이었다.

“19세기 연극을 현대적 개인주의와 연결해 풀어낸 착안점이 좋았고 장면 장면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현대 미술작품을 연상시켰다, 무대에서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는 음악도 환상적이었다.” (프랭크 포드 애들레이드대 드라마학과 교수)

“‘한여름 밤의 꿈’과 ‘햄릿’으로 여러 차례 애들레이드를 찾았던 극단 여행자가 입센의 고전에 새로운 시각을 가미해 그들 최고의 무대를 보여줬다.”(호주 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 리뷰 기사)

영국의 동물학자 클라이브 브롬홀은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이란 책에서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을 늦춘 것이 만물의 영장이 된 비결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포유류는 1∼2년 만에 성체가 되지만 인간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하다. 대신 인간은 단체로 생존하는 데 필요한 사교성과 협동성이 높아졌고 부수적으로 상상력과 창조력이 강화됐다. 브롬홀은 이런 인간만의 독특한 진화전략에 대해 ‘유아화 전략’이라고 이름 붙였다.

극단 여행자의 ‘페르 귄트’를 읽어내는 키워드도 ‘유아화 전략’이다. 무대부터가 어린이들의 놀이터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 원작의 ‘페르 귄트’(1867년)는 무려 5막 38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로 악명 높다. 북유럽의 고산준령과 북아프리카의 바다와 사막을 넘나들고, 북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트롤의 성과 이집트의 정신병원이 등장한다.

여행자의 ‘페르 귄트’는 그 자유분방한 시공간을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응축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위에서 펼치는 흙놀이, 물놀이가 된다. 페르(정해균)가 여인들과 분탕질을 치는 장면에선 물장난이 펼쳐진다. 페르가 최후를 예감한 어머니 오세(김은희)와 마지막으로 펼치는 썰매놀이에선 욕조가 썰매가 되고, 세발자전거가 썰매를 끄는 말이 된다. 트롤 왕(전주용)의 보좌는 놀이터의 구름다리이고 트롤의 무리는 모두 기저귀를 차고 있다.

페르의 캐릭터도 어린이의 그것을 닮았다. 그의 숱한 모험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라’라는 트롤족의 모토를 가장 열심히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정신분석학에서 슈퍼에고(초자아)의 통제를 내면화하기 전 에고(자아)에 가장 충실한 존재가 바로 어린이 아니었던가.

페르 귄트는 ‘북유럽의 파우스트’로 불린다. 실제 공연보다는 시적 대사를 강조한 운문체 레제드라마(책으로 읽는 희곡)로 쓰였고, 주인공이 천편일률적인 윤리·도덕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아실현을 위해 모험을 거듭하지만 최후의 구원을 여인에게서 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괴테의 파우스트가 계몽주의의 영웅이라면 입센의 페르 귄트는 에고이즘의 화신이다. 파우스트가 욕망의 본질을 극한까지 추구한 실험가라면 페르 귄트는 욕망의 무지개를 좇는 사냥꾼이다. 그래서 페르 귄트는 돈과 권력에 대한 무한추구에 빠진 우리를 더 닮았다.

연극이 끝나면 관객은 객석 맞은편에 설치된 10m²의 대형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곧 영원한 어린이를 꿈꾸는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 애들레이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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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14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4만 원. 02-2005-011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망연자실#연극#여행자#페르 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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