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프리즘/허승호]현대車 노조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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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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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호 논설위원
허승호 논설위원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제3공장의 아반떼 의장라인. 뼈대뿐인 차체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오면 근로자들이 엔진 모듈, 계기판 모듈, 하체 모듈, 좌석, 문짝, 바퀴 등을 차례로 장착한다. 반석기업 성광기업 등 조끼를 입은 사내 하청 근로자와 ‘의장3부’ 조끼의 현대차 정규직원이 함께 일하고 있다.

“작업 라인에서 무협지 읽기까지”


눈여겨보면 컨베이어벨트가 생각보다 천천히 움직인다. 전동렌치로 구성품을 잠깐 장착하고 나면 한참을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기자가 ‘하나 둘’ 하며 시간을 재봤더니 쉬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의 3배쯤 돼보였다. 20세기 초 미국 포드자동차 공장에서 처음 도입한 컨베이어시스템은 규격화된 대량생산의 시대를 열었지만 작업주체 자리에 사람 대신 기계를 앉힘으로써 인간소외도 낳았다.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기계의 부속물이 된 찰리 채플린이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바로 그 장면이다. 하지만 울산공장의 컨베이어는 딴판이었다. 여유만만, 아니 지나치게 느슨했다.

이튿날 중국 베이징에 있는 ‘베이징현대’ 공장에 갔다. 매우 달랐다. 젊은 근로자들이 한눈팔지 않고 작업하고 있었다. 휴식 의자는 없었고 틈이 나면 잠깐 기대 쉬었다. TV에서 보는 ‘착착 돌아가는 생산시스템’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자가 두 공장을 연이어 방문한 것은 현대차 간부와 만나 대화하던 중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20여 년간 노조에 끌려다니다 보니 현장의 근로기강이 다 무너졌다. 편성효율(적정인원/실제인원)이 53%밖에 안 된다. 53명이 할 일에 100명이 투입돼 있다는 뜻이다. 베이징현대(87%)나 앨라배마 공장(92%)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 근로자들이 작업라인에서 무협지를 읽고, 게임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사례도 있다.” 이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내 눈으로 현장을 보러 간 것이다.

한국의 대표기업 현대차의 생산현장이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노조와 회사의 합작품이다. 신기술 자동화 모듈화 등으로 노동력 절감이 가능할 때에도 힘센 노조의 반대에 부딪혀 매번 회사는 사람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지 못했다. 당장의 생산손실이 두려워 노조와의 정면대응을 피한 거다. 20년간 이런 일이 반복되자 편성효율 53%라는 기막힌 수치가 생겨났다. ‘아반떼 바퀴를 장착하는 근로자가 투싼 바퀴도 장착하라’는 전환배치 및 혼류생산에 대한 노조의 끈질긴 거부도 같은 맥락이다. 노조가 괴물이 되면서 노조원들을 타락시켰고, 노조원까지 자신도 모르게 괴물이 된 것. 현대차 노조의 설립자들은 ‘이런 노조를 만들려 한 게 아닌데…’라며 개탄한다.

현대차 노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태어났다. 동아일보 노조도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 기자는 직책 때문에 노조 가입 자격을 잃을 때까지 노조원이었고, 노조에서 주요 간부도 지냈다. 그러나 이런 노동윤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노동운동이 ‘경제주의’에 빠지면 눈앞의 이익에 민감할 뿐 노동자로서의 자긍심 사명감은 미약해진다. 조합이기주의다.

정치에 빠지고 노동윤리는 추락


반면 ‘정치적 노동운동’에선 도덕적 타락은 덜하지만 정치세력화의 전진기지가 돼 공허한 강경투쟁에 빠지곤 한다. 현대차 노조는 통합진보당 NL(민족해방)계열의 주요 기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차 노조는 외부적으로 정치 경도, 내부적으로 타락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현대차는 세계 5위 자동차 업체로 올라섰다. 미국 업체의 경영 악화, 도요타의 리콜 등 외부 요인도 있었지만 연구개발과 품질경영 등 내부 경쟁력이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 덕분은 아니다. 노조와 노조원들은 최고 직장에 걸맞은 기여를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퇴직 때까지 회사가 망할 것 같지는 않으니 최대한 뽑아먹자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치열한 국제 경쟁이 벌어지는 자동차산업에서 언제까지 이런 노동윤리를 용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울산, 베이징에서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경제 프리즘#허승호#현대자동차#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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