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첫 고백처럼… 아직도 설레는 ‘여백과 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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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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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수 ‘봄을 기다리는 소년’전
정주영 ‘The Same Yet Different’전

남정 박노수 화백의 산수에는 여백과 여운의 미가 살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4월 18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채색과 수묵을 절제된 색채와 간결한 선묘로 융합한 남정의 회고전을 연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남정 박노수 화백의 산수에는 여백과 여운의 미가 살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4월 18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채색과 수묵을 절제된 색채와 간결한 선묘로 융합한 남정의 회고전을 연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마음이 맑고 투명해진다. 텅 빈 여백과 명징한 색채가 어우러진 그림들이 헝클어진 생각마저 가라앉혀 준다.

4월 18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박노수: 봄을 기다리는 소년’전은 한국화의 웅숭깊은 매력을 재발견하는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이 전시는 2003년 뇌수종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운 남정 박노수 화백(83)의 평생 작업을 살펴보는 회고전이다.

대담한 구도, 흰색과 청색의 강렬한 대비, 선과 여백의 미를 살린 그림마다 전통의 멋스러운 운치와 함께 화가의 꼿꼿한 정신세계가 녹아 있다. 산수 인물 절지화 등 다양한 대표작과 드로잉을 포함한 100여 점 및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을 선보여 화가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꽉채우지 않은 채색
화려하지 않은 수묵
단절되려는 전통의 맥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


광복 이후 한국 화단이 정체성을 모색하던 시기에 화가로 입문한 남정. 많은 화가들이 먹이나 추상을 지향했던 시절, 그는 수묵과 채색을 융합한 한국화를 고집해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의 숨결이 스며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다. 박수진 학예사는 “그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단절되려는 전통의 맥을 끌어내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찾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고 소개했다. 02-2188-6000

○ 마음의 산수… 고전의 새로운 창조

남정은 도제식 교육을 통한 ‘무릎제자’가 아니라 현대적 대학교육을 통해 배출된 광복 후 1세대 화가다. 28세에 국전에서 수묵채색화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주목받은 그는 ‘고예독왕(孤詣獨往)’이란 말을 정신적 나침반으로 삼고 있다. 작가의 길은 험하고 고독하기 끝이 없지만 기존의 것을 추종하기보다 개성적 표현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의미다.

옛것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창조에 매진한 남정. “그림엔 여운이 있어야 한다”는 스승(청전 이상범)의 가르침대로 간결하면서 대담하고, 시적 정취가 살아 있는 회화세계를 구축한다. 특히 전시에선 물감이 묻어날 듯 청명한 색상에 서정적 감성이 녹아든 산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실적 경치가 아니라 마음속 자연을 담아낸 산수에선 선, 먹, 채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격조 높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림 속에선 푸른 산을 홀로 소요하는 소년이 보인다. 기성세계에 순응하기보다 이상을 간직하려는 화가의 모습을 투영한 이미지이다.

18세기 진경산수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변용해 표현한 정주영 씨의 ‘인왕산’. 사진 제공 몽인아트센터
18세기 진경산수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변용해 표현한 정주영 씨의 ‘인왕산’. 사진 제공 몽인아트센터

○ 풍경-산수 아닌… 고전의 재해석

벽면을 채운 인왕산의 웅장한 초상. 길이가 8m에 이른다.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리기 위해 바라본 산을 현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그림이다. 옛사람과 오늘의 시선이 포개진 산은 시간을 뛰어넘는 영구함의 표상으로 빛을 발한다.

5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몽인아트센터(02-736-1446)에서 열리는 정주영 씨(41)의 ‘The Same Yet Different(하나이면서 둘인)’전. 서양화를 전공한 정 씨가 ‘산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그러나 그 모두인 것’을, ‘서양의 풍경화도 아니고 동양의 산수화도 아닌, 그러나 그 모두인 것’을 탐색한 작업이다. ‘오늘날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태도인가’에 대한 해답을 궁리하는 그의 눈길이 전통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들 전시의 성격은 사뭇 달라도 우리의 옛것에서 새로운 조형어법을 찾으려는 모색이란 점에서 맥이 닿는다. 서구미술의 개념을 맹신하고 유행을 추종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권하고 싶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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