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답사기 30선]<3>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 입력 2007년 4월 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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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날지라도 낭비하지 않았으며 모자람이 있어도 옹졸하지 않았던 분들, 배우지 않았어도 결코 무지하지 않으며… 환경이라는 말이 없어도 자연과의 조화를 으뜸으로 여기며 이 땅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아끼며 살다간 이름 없는 스님들, 목수님들, 장인들….》

가람에 담긴 건축의 지혜

저자 김봉렬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 내 나이 마흔 무렵이었는데 그는 서른 전으로 건축 역사를 연구하는 여러 학자 중에 섞여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전혀 새로운 눈과 삶을 통한 성찰로 이루어진 신선한 감성이 내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건축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디밀긴 했으면서도 불혹의 나이에 응당 가졌어야 할 역사인식도 뚜렷하지 않았고 공부도 턱없이 부족했었다. 한국 건축이라고 해야 난해한 양식해설과 별 뜻 없어 보이는 연혁 따위로 가득한 건축사책만 들여다보던 나 같은 실무건축가에게 그의 명쾌하며 신념으로 가득 찬 한국건축 읽기는 축복이었다.

그는 역사와 시간과 인간과 삶의 터로서 ‘장소’를 이야기하고, 선인들의 시대정신과 사상을 통하여 남겨진 소중한 유산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이 땅에서 작업하면서 나는 으레 깨닫고, 느끼며, 실천해야 할 많은 부분을 그의 사고와 연구에 힘입어 조금씩 깨쳤다. 그로부터 20년 넘게 그는 나에게 여전히 선생이다.

21세기 초에 새로 저작한 이 책에서 그는 그간의 연구와 이론을 바탕으로 깊은 애정과 통찰력을 갖고 우리의 절집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한국의 가람을 바라보는 틀, 다시 말해 여섯 개의 키워드는 절로 가는 길, 어우러짐, 넉넉함, 멋스러움, 성스러움, 소박함이다. 그는 지형과 교리에 따라 배열된 절집의 영역에서, 자연과의 조화에서, 건축적 표현으로서, 건축 자체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운 정신으로서, 그리고 절제의 미학으로 가람의 참다운 가치를 설파한다.

영남지방의 절집을 예로 들어보자. 해인사 터의 형국을 주관하는 토지신을 모시는 국사단의 공간을 봉황문과 해탈문 사이에 둔 것은 가람의 안과 밖, 토속신앙과 불교가 만나는 지형적, 교리적으로 이중적인 경계의 공간, ‘균형과 조형, 비대칭적 대칭성’ 등 조형미학에서 말하는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릴 적 소풍날이면 으레 드나들던 동래 범어사의 3칸짜리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으로 이르는 공간구성을 완벽한 ‘건축적 장치’로서 알게 된 것도 그의 설명을 통해서였다. 달성군에 있는 유가사 입구의 큰 바위로 이루어진 오솔길에서, 자연을 사찰건축의 주인공으로 부각시키며 ‘유가사의 인공적인 건물들이란 비슬산의 대자연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이요 무대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불교건축의 안내서가 아니다. 김봉렬은 우리 가람을 만든 스님(건축가)들의 시대정신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찾아가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일깨워준다. 이 책은 자분자분하게 일러 주던 그의 살아 있는 목소리다. 나아가 아름다운 그의 글과 함께 흐르는 사진은 그 축복을 더 크게 느끼도록 만들어 준다(그 사진을 찍은 관조 스님이 지난해 말 입적하셨다고 들었다).

조성룡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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