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 당당한 ‘세상의 절반’]<2>경제계에도 女風

  • 입력 2005년 3월 2일 17시 50분


코멘트
“여성파워 우리가 개척”한국IBM은 2년마다 회사의 남성 중역들까지 모두 참가한 가운데 ‘한국IBM 우먼 콘퍼런스’를 열고 여성 인력의 역량 개발과 지위 향상 방안을 논의한다. 지난해 8월 열린 콘퍼런스에서 새로 선임된 제4기 ‘우먼 카운슬(Women Council)’ 임원들이 지난달 말 여직원 네트워크 강화 및 사무실 내 어린이집 운영 등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여성파워 우리가 개척”
한국IBM은 2년마다 회사의 남성 중역들까지 모두 참가한 가운데 ‘한국IBM 우먼 콘퍼런스’를 열고 여성 인력의 역량 개발과 지위 향상 방안을 논의한다. 지난해 8월 열린 콘퍼런스에서 새로 선임된 제4기 ‘우먼 카운슬(Women Council)’ 임원들이 지난달 말 여직원 네트워크 강화 및 사무실 내 어린이집 운영 등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대우가 국내기업 중 처음으로 대졸 여직원 공채를 실시했다. 5318명이 접수해 26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남자 사원은 서류와 면접으로 채용했지만 여직원은 공채를 처음 시도하는 입장이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자료가 요구돼 필기시험을 치렀다.”(대우그룹 사보 ‘대우가족’ 1985년 11월 호)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대기업들은 여성 대졸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모험’을 했다. 여성이 대기업에 신입사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2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요즘, 여성들은 기업의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 대기업에는 과장급 이상 여성이 대거 포진했고, 여성 최고경영자(CEO)나 여성 임원도 생소하지 않게 됐다. 기업 활동에서 ‘의사결정권’을 갖는 여성이 많아지면서 기업문화가 적지 않게 바뀔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여성, 기업의 리더로 약진=최근 실시된 10대 그룹 정기인사에서 7명의 여성 임원이 새로 탄생했다. 새로 승진한 임원을 포함해 여성임원은 삼성그룹에 14명, LG그룹에 9명이 있다. 오너 일가가 아니라 차곡차곡 내부 승진을 통해 임원에 오른 여성들이 적지 않다. SK그룹은 지난해 여성 임원 2명을 영입했다. 헤드헌팅 업체에는 여성 임원을 물색해 달라는 기업들의 요청도 늘고 있다.

임원은 아니지만 ‘팀장’의 역할을 수행하며 일정한 의사결정권을 갖는 과장·부장급 관리직 여성도 대거 늘었다. 대기업 여성 대졸사원 공채 첫 세대의 상당수는 과장 이상의 직급을 달았다. 은행권에는 여성 지점장 비중이 4%가량 된다. 김승유 하나은행장은 “5년 이내에 20% 이상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 CEO도 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대표가 여성인 사업체는 1997년 32.4%에서 2003년 36.0%로 증가했다.

▽여성 리더, 왜 늘어나나=여성인력의 활용이 경쟁력과 직결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주희 연구위원은 “1인당 국민소득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위 16개국의 평균 수준으로 올리려면 향후 10년간 300만 명의 신규 인력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며 “출산율 저하 추세를 감안할 때 여성인력 활용이 필수적이다”고 설명했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정남희 이사는 “여성의 구매력이 커진 상황에서 기업들은 여성을 모르고서는 마케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경영전략을 짜는 데 여성 리더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비씨카드에 따르면 전체 신용카드 사용액에서 여성회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9년 37.9%에서 2004년 42.0%로 늘었다.

▽여성 리더를 위한 인프라도 증가=웨스틴조선호텔 김경희 과장은 2002년 9월부터 4개월간 이화여대에서 ‘여성 고위경영자 과정’을 수강했다. 조직관리, 재무관리, 세무 등 경영전반에 대한 내용이었다. 비용은 전액 회사에서 부담했다. 삼성전자는 여성 과장 2년차를 대상으로 리더십 강화를 위한 합숙 교육을 매년 진행하고 있다.

과거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은 모든 것을 ‘나 홀로’ 헤쳐가야 했지만 이제 여성 리더십을 위한 인프라도 갖춰지고 있다.

여성들이 경제활동에서 가장 큰 곤란을 겪는 부분인 육아에 대한 지원도 늘고 있다. 한국IBM, 대교, 하나은행, NHN은 공동으로 직장보육시설인 ‘푸르니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생후 6개월부터 취학 전까지의 아동을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10시까지 돌봐준다.

▽여성리더가 바꾸는 기업문화=본보가 주요기업 여성 임원과 관리직 3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대부분 자신의 리더십을 “‘나를 따르라’식보다는 직원들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코치형 리더십’”이라고 표현했다.

한국투자증권의 박미경 고객자산관리부장은 “조직 구성원들이 회사를 위한 부품으로 여겨지기보다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 업무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며 “21세기형 리더십이어서 남성 리더에게도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화재 박현정 상무보는 “여성 직원, 여성 리더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남성 직원에게까지도) 집과 직장의 균형, 일과 삶의 균형이 양립하는 쪽으로 가치가 다양화된다”고 설명했다. 박 상무보는 “최근 기업들이 ‘펀(fun) 경영’이나, ‘일과 삶의 조화(work-life balance)’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업에서 여성 리더가 많아지면 재무건전성이 개선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여성개발원 김영옥 노동통계연구부장은 보고서에서 “여성 기업인들은 재무관리에서 수익성이나 성장성보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1997년 후반 중소기업체의 평균 어음부도율이 30%를 넘어설 때도 여성 기업인의 부도비율은 7%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女상사 못미더워…” 불신의 벽 여전▼


대기업 홍보실에서 근무하던 송모(35·여) 씨는 재작년 사표를 쓰고 스스로 회사를 차렸다. 창업을 결심한 이유는 조직 내에서 성장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 송 사장은 “직장 상사가 ‘여자이지만 차장까지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비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경제 분야에서 여성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아직은 보이지 않는 장벽도 남아 있다. 의사결정권을 가진 리더로 올라서기까지는 남성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여성 직원의 양적 증가는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그러나 막상 여성 임원이 늘어나는 데 대해서는 미묘한 거부감이 남아 있는 기업이 상당수다.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H사의 한 임원은 “싫다기보다는 어색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국내 10대 그룹에서 여성 임원의 비율은 아직 전체의 1%도 안 된다. 상당수가 자녀 양육 등으로 ‘중도하차’해 임원급 승진 시기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여성이 적은 것도 한 원인.

역시 대기업에서 일하는 이모(38) 차장은 “발 넓고 힘 있는 상사 밑에서 일해야 쑥쑥 클 수 있는데 여성 상사는 회사 내 인맥이 약해 끌어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여자라서가 아니라 파워가 약한 소수라서 모시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유리 천장’ 외에 핵심 부서로의 진입을 제한하는 ‘유리벽’도 존재한다. 과거 여성들은 기획실이나 영업, 인사 부서보다는 광고, 총무, 인터넷 관리팀으로 발령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외국계 회사의 이모(35·여) 차장은 과거 대기업에서 근무할 때 인사팀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이 차장은 “남성들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과정을 보면서 인사 부서에 여성이 더 많았다면 조직 구성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 차장은 1999년 남성 중심의 문화에 적응이 잘 안 된다는 이유로 회사를 옮겼다.

육아나 출산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여성의 연령별 경제활동참여율 그래프는 선진국의 ‘∩’자와는 달리 ‘M’자로 그려진다. 상당수가 20대 후반에 아이를 낳으면서 일을 그만둬 참여율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리더가 될 수 있는 모집단 자체가 줄어드는 셈이다.

특히 직장 여성은 공직자 변호사 회계사 같은 전문직과 달리 공백기 후 재진입이 어렵다.

한국여성개발원 김종숙 박사는 “여성의 경제활동은 40대 이후 다시 늘어나지만 대부분 불안정하고 단기적인 계약직에 그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KT 권은희 상무는 “제도적 평등과는 별도로 관습적으로는 아직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보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며 “여성 인재 육성은 최고경영자의 결단이 필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