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22>주변국의 사례上

입력 2004-09-16 19:01수정 2009-10-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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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촉발된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분쟁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등장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엿보였다. 장쩌민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왼쪽)는 1991년 5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오른쪽)과 국경 협정에 서명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지구촌 곳곳에 영토분쟁의 현장이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곳이다. 그곳엔 대개 근·현대사의 깊은 상흔이 남아 있다. 한반도 주변 동아시아 지역의 영토분쟁은 우리에게도 ‘강 건너 불’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웃하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중국-러시아 국경분쟁 △일본-러시아 간 북방 4개 섬 분쟁 △중국-일본 간 센카쿠(댜오위타이) 분쟁 △6개국의 이해가 얽힌 난사군도 분쟁을 들 수 있다. 2회로 나눠 소개한다.》

▼중-러 분쟁▼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인종의 전시장’이다. 이중 중국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중국인들은 생필품시장을 비롯한 주요 상권을 완전 장악했다. 자연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140여 년 전에 얻은 연해주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 조선 땅까지 넘겨버린 베이징조약

1860년 제정 러시아는 베이징조약을 맺어 청나라로부터 헤이룽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을 빼앗았다. 당시 제정 러시아가 확장한 지역은 조선영토였던 연해주를 포함해 104km²에 이른다. 한반도의 5배 가까운 넓이다.

1963년 중국은 소련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제정 러시아 시절 빼앗긴 영토는 재론하지 않더라도 동부국경 4280km와 서부국경 2978km를 분명하게 정하자는 제안이었다. 물론 중-소간의 타협과 관계없이 베이징조약은 한국에 대한 구속력이 없다.

소련은 그 때까지 강으로 나뉜 국경선의 경우 중국 쪽 강안(江岸)을 경계로 삼아 강 복판에 있는 1845개의 섬들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은 국제법대로 국경선을 강 중앙으로 설정, 총면적 787km²에 이르는 890여개의 섬을 되찾으려 한 것이다.

● 중-소 무력충돌과 새 국경선 획정

그러나 국경선 협상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양국간에 소소한 무력충돌이 잦았다. 1969년 중국군이 우수리강의 소련군 막사를 기습, 35명을 살해한 전바오(珍寶·다만스키)섬 사태는 심각한 긴장을 조성했다.

며칠 뒤 소련군도 보복공격을 감행한 사실이 서방 정보기관에 포착됐으나 정확한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두 나라는 국경선 도처에서 수백 건의 충돌을 일으켰다.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된 것은 17년이 지나서였다.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에서 “중-소 국경은 주요 수로를 근거로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중국 요구대로 강의 중앙을 국경선으로 삼겠다는 의사표시였다.

●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분쟁의 불씨

1991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때 양국은 전바오섬 등을 중국영토로 하는 협정안에 서명했다. 이어 1996년 중국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타지크 등과 함께 서부국경을 확정했다. 1997년엔 장쩌민 주석이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동부국경을 확정했다.

그러나 동부국경 가운데 아무르강의 볼쇼이-우수리스크섬과 아르군강의 볼쇼이섬등 총 19km 구간은 미해결로 남아 있다. 현지 주민들이 “러시아 땅을 중국에 빼앗긴다”며 협상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중국인들의 대거 진출에 불안감을 느낀 민족감정의 분출로 볼 수 있다.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조차 중-러 접경도시인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지역 공용어가 중국어가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 중-소 국경분쟁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러-일 분쟁▼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9월2일 직접 북방 도서 근처를 시찰하는 열의를 보였다. 일본 정치권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북방 4개 섬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일본 역대 총리들은 자신이 북방 도서를 되찾는 영예를 안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러시아와 적극적인 협상을 벌여왔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난 7월 16일 일본 홋카이도를 출발해 북방 4개 섬을 순회하는 크루즈 관광여객선이 처음으로 출발했다. 일본 정부는 북방영토 반환을 외교의 최우선과제로 설정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지난 2일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타고 이들 섬을 시찰하기도 했다.

● 國勢에 따라 임자 바뀐 비운의 섬

쿠릴열도의 일부인 4개 섬은 하보마이 시코탄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이다. 홋카이도에서 구나시리가 가장 가깝고 에토로후가 제일 멀다. 총 면적은 5036km²로 오키나와의 약 4배. 러시아 사할린주가 관할하며 인구는 1만9000여명이다.

이 곳의 분쟁은 제정 러시아가 19세기 초 사할린과 쿠릴 열도까지 남하했을 때 촉발됐다. 결국 제정 러시아와 일본은 1855년 시모다 조약을 맺고 4개 섬은 일본령으로, 나머지 쿠릴열도는 러시아령으로, 사할린은 양국이 공유하기로 했다.

이 약속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제정 러시아는 1875년 군사력을 동원해 사할린을 모두 차지하는 대신 쿠릴열도를 일본에 내줬다. 일본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다시 북위 50도 이남의 남부 사할린을 빼앗았다.

● 냉전시대에 키운 불신과 반발의 덫

소련은 2차대전에 참전하면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영유권을 인정하겠다는 미국과 영국의 제의를 받고 종전 직전 사할린과 쿠릴열도 전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1951년 샌프란시스코 회담은 이 지역을 소련 영토라고 추인하지 않았다. 거기엔 공산주의 확산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56년 하토야마 이치로 일본 외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소련은 평화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시코탄과 하보마이 2개 섬을 양도할 의사를 내비친 적이 있다. 이번에도 미국이 제동을 걸었다. 일본이 소련의 제의를 수용하면 오키나와를 병합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1960년 미-일 신안보조약과 1978년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은 소련의 반발을 더욱 키웠다. 소련은 1978년 “4개 섬은 소련영토이므로 일본에 인도할 수 없다”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 경제협력을 위한 미끼로 활용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은 일본의 경제지원을 얻기 위해 “영토문제는 해결돼야 한다”는 유연한 입장으로 선회했다. 일본도 대화에 나서 1991년 고르바초프의 일본 방문으로 이어졌다.

이후 옐친은 일본의 대규모 경제지원을 조건으로 4개 섬의 단계적 반환이라는 파격적인 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푸틴도 2001년 러-일 정상회담에서 시코탄과 하보마이 2개 섬의 우선 인도를 시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쟁의 파고는 쉬 잠잠해질 것 같지 않다. 세계 3대 어장의 하나인 4개 섬 주변엔 막대한 해저광물과 석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이들 섬과 사할린주 주민들은 “분리독립 불사”까지 외치며 반환을 극력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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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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