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기웅/책마을 파주의 걱정

  • 입력 2003년 5월 30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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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坡州)시의 교하(交河)읍, 그곳에서도 문발(文發)이라는 동네에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라고 불리는 긴 이름의 국가산업단지가 15년째 건설되고 있다. ‘출판도시(出版都市)’ 또는 ‘북시티’ ‘책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프로젝트는 온 국민이 관심을 갖기에 충분해 최근에는 그 현장을 보려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민간의 힘으로 만든 ‘출판메카’▼

국가산업단지라고 하지만 국가가 입안한 것이 아니라 민간조직이 제안해 추진해 왔고, 이를 정부가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드문 예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처음부터 최근까지 이 사업에 관여했던 한 행정관료는 이 사업을 가리켜 ‘가장 성공한 NGO의 작품’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사업이 법적 근거 때문에 종래 개발독재시대에나 유용했던 ‘공업단지’라는 개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업의 추진 주체는 지혜롭게도 시대에 맞지 않는 법의 정비를 무한정 기다리지 않고 도시계획가-건축가들과 힘을 합쳐 아름답고 환경친화적인 ‘도시’의 개념으로 개발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도시에서는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간판은 숨어 있는 듯해서, 마치 품위 있는 식당에서 점잖은 손님들이 식사하면서 조용조용 대화하는 것 같다. 모든 간판이 절제함으로써 기호로서의 간판과 미학으로서의 간판을 충분히 성공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질서한 도시계획, 말도 안 되는 도로체계, 건축물들간의 부조화와 건축 재료의 조악함, 도처에 여러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탐욕과 과장 등 이제까지 우리를 괴롭혀 왔던 도시환경들이 이곳 출판도시에서는 잘 극복되고 있다. 모든 게 고도로 절제돼 있고 ‘공동성’이 우선한다. 모든 것이 엄격한 지침 아래 시행되어 조화의 미덕을 얻으려 하고 있다. 채우기를 생각하기보다 ‘비워 두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둔다. 꿈과 예절이 넘쳐흐르게 하고자 한다.

이들이 또한 주목했던 것은 이곳 파주의 ‘역사성’이었다. 여러 사서(史書)나 지리지(地理誌)에 의하면, 파주의 역사는 유장하고 심원하다. 고대국가 시기부터 한반도 중심부에 자리하면서 감악산 내령 비로봉에 이어 아름다운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내려와 곱게 자리한 고장이다. 고려-조선조를 통해 송도인 개성과 한양인 서울 중간에 위치하면서 수많은 문예인과 학자, 그리고 정치인들이 정자를 건립해 시유(詩遊)를 즐겼으며, 서원(書院)을 건립해 강학(講學)을 논했던 빛나는 문향(文鄕)이었다. 진정 이 땅에서는 향기가 났다. 풍수해를 모르는 곡창지대였으며, 조선조 때 이의신(李懿信)이란 자는 도성의 지기가 쇠한다 하여 이곳 교하로의 천도(遷都)를 주장했던 명당터였다. 그러나 6·25전쟁 때엔 격전의 장소이자 동족상잔과 분단의 슬픈 눈물이 밴 땅이기도 하다.

그래서 출판도시의 성공은 유구한 파주 역사의 기념비가 돼야 한다. 건물 하나하나의 건축적 성취, 그리고 출판문화적 성과는 우리 분단의 근대사와 함께 얼룩졌던 슬픔을 달래는 레퀴엠이 돼야 한다. 출판도시가 자리한 동네 이름 ‘문발’이야말로 ‘문화 발전’의 터요, 책의 메카를 마련하도록 준비된 약속의 땅이 아닌가 한다.

▼신도시 난개발로 이어져선 안돼 ▼

이제 한창 입주가 시작된 이곳 ‘파주 북시티’에 최근 유명 출판사들이 사옥을 옮겨 왔거나 속속 이주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화제가 되는 데다 출판단지에 인접한 파주의 신도시 계획이 발표돼 한창 이곳이 뜨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입주했거나 입주를 준비하고 있는 출판사 관계자들은 축하인사 받기에 바쁘다.

하지만 실은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정부에서 발표한 신도시의 밑그림은 매우 그럴 듯하지만 또 하나의 난개발을 보게 될 것이 뻔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파주 땅을 아끼는 사람들의 이 같은 걱정이 노파심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기웅 열화당 대표·파주출판도시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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