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나머지' 절반의 신뢰'

  • 입력 2003년 5월 21일 18시 23분


코멘트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후 시중에서 자주 듣는 말이 ‘돌아와서 이젠 딴말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한미 50년 동맹의 기조까지 흔들었던, 반미감정으로 인한 신뢰위기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경고일 것이다. 대통령의 방미를 굴욕외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미 분위기를 우려하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은 복이라면 복이다. 그 경고 속엔 노 대통령이 미국 방문에서 그나마 쌓은 신뢰관계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리지 말라는 주문도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미국과의 신뢰를 확실하게 쌓아놓고 왔는가. 그 대답은 미국측이 보인 신뢰의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측은 절반의 신뢰만 표시한 것 같다. 나머지 절반의 신뢰는 일단 유보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 판단일 것이다.

▼친미발언에 감동했을까 ▼

제일 확실한 그 물증이 정상회담 후의 공동성명이다. 미국측이 최후 순간까지 주장한 ‘북한 선제공격을 포함한 모든 선택(all options)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넣지 않는 대신 ‘평화적인 수단을 통한 북핵 제거를 재천명하고…, 위협이 증대될 경우 추가적 조치의 검토가 이루어질 것에 유의하면서…’라는 문구는 나머지 절반신뢰의 유보를 시사한다. 결국 공동성명에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해 온 한국 입장이 반영됐으나 ‘조건부’의 모습이고 미국 입장은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는 ‘잠복형’의 형세다. 한마디로 양측이 중간에서 서로의 체면을 살리는 쪽으로 타협한 인상이다. 사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미국 방문을 수세적 입장에서 출발했다. 특히 북핵과 관련해 미국에선 대북 선제공격을 포함한 강경론이 고개를 들었고 동시에 주한미군의 위치도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에겐 선택이 많지 않았다. 미국의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일단 ‘유보적 조치’에라도 묶어두는 것이 화급한 과제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욕심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기에 아쉬운 점은 없다’는 대통령의 귀국길 토로는 현실적이다. 미국 도착 후 노 대통령은 ‘찬미(讚美)’성 발언을 많이 했다. 반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번 흔들린 국가간 신뢰를 복원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새삼 절감했을 것이다. ‘입바른 소리나 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면 도움이 됐겠는가’ 했지만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기억하고 있는 미국측이 속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180도 달라진 내용에 미국측은 호감보다는 되레 무엇이 진심이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미국측은 그런 발언에 별로 감동 받은 것 같지 않다. 몇 마디 말에 신뢰하고 말고 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그들이 아니지 않은가.

이번 회담은 정확히 말해서 북핵을 포함한 한미간 현안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더 고난도의 문제를 남겼다. 이번 대좌에서 미뤄진 나머지 절반의 신뢰도 이 후반부에 달려 있다. DJ정부와 햇볕정책을 놓고 심각한 이견을 보였던 미국은 앞으로 반미감정의 추이와 함께 대북정책을 지켜볼 것이다. 그것이 나머지 절반신뢰의 검증대인 셈이다. 안도하기엔 아직 이르다.

▼평화정책의 생존력 ▼

여기서 정부 스스로 햇볕정책을 답습한 ‘평화번영정책’의 국제적 생존력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대테러전쟁과 대량살상무기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긴박한 상황에서 햇볕정책에 대한 국제적 지지는 이미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싫든 좋든 신보수주의로 무장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무대가 전투적 분위기로 급변한 판국에 고전적 평화정책이 살아남을 여지는 그만큼 좁아졌다. 이와는 별도로 햇볕정책으로 대북 운신이 얼마나 불편했던가를 상기할 필요도 있다. 평화를 추구하되 추진방법은 다양해야 하지 않은가. 정부가 회담 최대 성과로 꼽는 ‘평화적 해결’ 속엔 그동안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력사용의 위협’이 엄연히 포함된다. 이참에 평화란 포장 속에 들어 있던 ‘무력사용 위협’을 밖으로 꺼내는 것은 어떻겠는가. 방미에서 드러난 대통령의 현실주의적 모습을 놓고 ‘대변신’이란 말이 나오지만 후속 언동을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 판단도 미뤄놓자.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