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마이스타일]주유진씨/N세대 사주보며 살기

  • 입력 2000년 3월 21일 19시 34분


△주유진씨(37세·역술가)△

나는 어려서부터 무덤가에서 놀기를 즐겼다. 거기서 물구나무서기와 단전호흡을 하노라면 마음이 마술처럼 편안해졌다.

사법고시에서 수차례 낙방했다. 이름난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평생 책을 끼고 살아갈 상”이라고 이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룸펜(백수)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부모님이 물려준 적지 않은 재산을 털어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어느날 낮 매도주문을 내어야 할 것 같은 직감이 강하게 뇌리를 쳤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해 취소해 버렸다. 그날 밤 금융실명제 실시가 전격 발표되었다. 다음날 아침, 3만원 하던 주당 가격은 8000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뒤 전자회사 기술자, 제약회사 영업사원, 악세사리점 사장으로 변신해 보았으나 역시 실패.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안될까? 자포자기 심정으로 사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92년이었다.

정통 역학인 명리학, 지리상 방향을 연구하는 기문둔갑, 별과 별 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자미두수, 관상, 수상 등 운명을 읽는 학문이라면 닥치는대로 공부했다. 서로 다른 문명간 충돌이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운명학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운명학은 콕 집어 말하는 직관을 길러주기 보다는 보다 높은 확률을 담보하는 ‘게임’이라는 것을. 내공이 제법 쌓인 96년부터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임상시험’에 돌입했다.

▼N세대와 사주?▼

N세대는 오히려 사주 궁합에 맹목적으로 빠져든다. 온라인상으로 채팅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친분이 싹트면 다짜고짜 남녀간에 생년월일시를 묻는다. PC통신이나 700유료전화 서비스로 궁합이나 상대방의 사주를 알아본 뒤 관계를 본격적으로 열어가는 것이다. 궁합 사주의 내용이 프로그램마다 다를 때 혼란에 빠진 N세대들은 역술원을 찾는다.

시험운에도 집착한다. 수능시험이나 입사시험이면 말도 않겠다. 중간고사 기간 요일별로 어느 날 시험을 잘 볼 것인가를 물어오는 고교생 대학생도 있다.

몇 년 전만해도 “어려서부터 재물운이 있을 것”이라는 사주풀이에 학생들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거나 복권을 샀으나, 지금은 한걸음에 달려가 휴학계를 내고 벤처기업을 차려버리니 나의 어깨가 한결 무거워짐을 느낀다. “지금 사귀는 남자와 헤어진다”고 예측하면 고개를 떨구기 보다는 “그럼, 다음 남자는 언제 생겨요. 키는 크나요?”란 질문을 발랄하고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N세대는 정작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해 방황한다. 스타크래프트에는 이기는 자와 지는 자만이 존재할 뿐 ‘나 자신’의 모습이 들어있지 않다. 한 치 앞 미래조차 빠르게 바뀌는데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더욱 역술에 기대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N세대를 위하여▼

N세대를 잡기 위해서 새로운 사주 관상 해법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쉽고, 논리적이고, 종합적이지 않으면 그 어떤 권위에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성질이 강하다.

그들에게 사주풀이도 하나의 학문임을 인식시킨다. 궁합의 경우는 기, 오행, 혈액형, 이름, 겉속 궁합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분석한 후 총점을 낸 종합점수를 낸다. 토익 토플시험이 끝난 뒤에는 전화를 걸어 예측대로 잘 봤는지를 체크하는 애프터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아파트촌 주부집단이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부각됨에 따라 아파트로 출장을 가기도 한다.매일 두시간씩 주식 관련 전문서적과 경제신문을 읽으며 주식 매매 시기와 종목에 대한 문의에 효과적인 답변을 하기 위한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

사주풀이의 영역에도 ‘새로운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생존의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성형수술을 계획하는 여성에게는 어떤 눈과 코를 만드는 것이 좋은지 일러준다. 물론 심성을 올곧게 쓰면 관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지니 마음 씀씀이가 최고의 성형술일 터이다.

소득 수준이 늘어남에 따라 애완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에도 나는 주목한다. 요즘은 중국의 ‘황극경세서’를 통해 식물과 동물의 운수학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복권을 사는 역술가?▼

나는 복권을 산다. 한달에 50만원어치를 산 적도 있다. 자기 사주를 알 수 있는 역술가가 왜 행운을 기대하냐고?

복권은 사지만 나는 절대 당첨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 이는 투자(재테크) 수단이다. 내 사주에는 커다란 행운이 결코 찾아 오지 않을 것으로 나와있다. 행운을 믿지 않기 때문에 복권을 ‘수집’하는 노력형을 선택한 것이다. 장차 태어날 쌍둥이 아들들(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내 사주에는 이렇게 나타난다)에게 귀중한 재산으로 물려줄 계획이다.

복권 외에도 공중전화카드 우표 화폐 보석원석 등을 닥치는대로 사 모은다. 특히 내 영혼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영화나 월트 디즈니 만화 비디오테이프를 모으는 데도 열심이다.

‘스타트랙’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특히 시간과 운명에 대한 깨달음을 주어 하염없는 눈물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시간을 너무 안타까워 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마라. 시간은 너와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라고 생각하라.”

진실로 사람들이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반자라고 느끼는 순간, 나는 실업자가 되지 않을까.

(37세인 주유진씨는 카페에서의 임상시험 기간을 거쳐 작년 10월 이화여대 인근에서 운명감정원을 운영 중이다. 주씨는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대뜸 생년월일시를 물었고, 풀이가 끝난 후 성품이 ‘괴팍’한 것으로 나타나자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리〓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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