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눈높이 국민에게 맞추라

  • 입력 1999년 11월 30일 19시 09분


새천년의 시작이 꼭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희망과 기대가 주변에 넘쳐야 할 때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세밑의 썰렁함과는 다른 차원의 분노가 저잣거리에 흐른다. 다가올 새천년도 결국 그렇고 그런 오늘의 연속일 뿐 아니겠느냐는 좌절감만 깊이 스며 있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분노의 원류(源流)로 작용하고 볼썽사나운 꼴을 고쳐잡을 만한 능력도 인물도 우리 사회에는 없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좌절을 더욱 깊게 한다.

▼自省만 있고 변화없어▼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는 김대중대통령의 장탄식도 분노의 기를 꺾지 못하는 것 같다. 좌절을 희망으로 되돌리지 못하고 공허한 수사(修辭)로만 떠돌아다닌다. 엊그제 대통령은 “경제를 일으켰고 사회도 안정됐다. 외교도 평가 받는데 유독 정치만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런 정치의 핵에 자신이 자리잡고 있음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1년 내내 터져나온 냄새나는 사건들과 자신은 무관함을 애써 강조하는 얘기였을까. 국민은 이런 유의 대범한 듯한 대통령의 말에 식상한 지 오래다. 사과와 자성의 소리는 그때뿐 변화가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나는 지금 정부와 대통령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한 달 남은 새천년을 오늘과 같은 난장판 속에서 맞아서야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으며 미래의 설계가 가능하겠는지를 이 정부와 대통령이 심사숙고하기 바랄 뿐이다. 왜 오늘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지 면밀히 판단해 위기의 터널을 한 달 안에 빠져나가야만 그런 대로 새천년을 맞이하는 자세라도 가다듬을 것 아닌가.

그러려면 우선 대통령이 눈높이를 국민에게 맞춰야 한다. 이른바 ‘옷로비 사건’으로 대표되는 현금의 위기는 대통령이 국민의 목소리보다 측근 또는 수족의 보고에만 의존한 데서 비롯됐다. 옷로비 사건의 검찰 수사 초기에 ‘마녀사냥’ 발언이 터져나온 것도 국민의 소리는 애써 무시하고 듣기 좋은 주변의 말에 빠진 탓이다. 서경원 전의원 밀입북사건을 10년 만에 끄집어내 1만달러 수수 건을 재수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국민은 이해한다. 요즘 벌어지는 갖가지 수사에 대해 국민은 “이것 또 속이는 것 아냐”라며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엄정수사 지침도 무시하고 사건을 축소조작해 온 사실이 드러난 검찰이 대통령이 직접 관련된 1만달러 건을 어떻게 발표하건 곧이곧대로 믿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눈높이를 국민에게 맞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대화하는 것이다. 불만이건 애정이건 호소건 꾸지람이건 하고 싶은 얘기를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국민을 직접 만나 상의하며 난국을 풀어나갈 지혜를 구하라는 것이다. 장소가 청와대 안이 아니고 상대가 청와대에서 고른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 대화는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다.

▼국민과 '열린 대화를▼

전과정을 TV로 생중계하는 것도 좋다. 사건들의 진상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섣불리 얘기할 계제가 아니라는 반론은 펴지 말기 바란다. 그때까지 파악한 상황을 그저 솔직하게 설명하면 된다. 사과할 것이 있으면 직접 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만든 신당이나 해외동포들 앞에서 밝히는 간접화법 사과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그래야 표류하는 민심의 실체도 읽고 새롭게 국면을 타개하는 전기도 마련된다.

내친 김에 대통령은 자신과 관련된 ‘1만 달러’건의 재조사 중단을 검찰에 지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참으로 억울하다면 임기가 끝난 후에, 아니면 검찰이 떳떳하게 거듭 태어났다고 국민 모두가 믿을 만한 시점에 수사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현재의 검찰에 하나라도 굴레를 벗겨주려면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바람을 억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옳지 않은가.

청와대가 기왕에 약속한 ‘국민과의 대화’를 무기연기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 상황이 어렵고 어지러운 때일수록 대통령은 국민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지금 ‘잘한다’고 칭찬하는 국민도 없겠지만 그런 이들하고만 대화한다고 해서야 어디 ‘국민의 정부’란 간판을 내걸 수 있겠는가. 국민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새천년의 기대를 높여주기 바란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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