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떠도는 명제… “끝까지 남는 자가 승리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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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말 한마디]김미희(영화사 ‘드림캡쳐’ 대표)

김미희(영화사 ‘드림캡쳐’ 대표)
김미희(영화사 ‘드림캡쳐’ 대표)
20대 중반 영화에 ‘영’자도 모르는 채 충무로에 발을 디뎠다. 30대 중반, 강우석 감독님의 시네마서비스에서 영화 기획을 하던 나는 영화제작자로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내 오랜 ‘보스’ 강 감독님이 내게 독립할 자금을 마련하라며 기회를 준 작품이 ‘투캅스3’였다.

강 감독님의 ‘투캅스’(1993년)가 당시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갈아 치운 영화였던 데다 속편 ‘투캅스2’(1996년) 역시 대박을 터뜨렸던 흥행작이었던 만큼 나는 ‘투캅스3’의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투캅스3’ 감독을 맡은 김상진 감독과 둘이서 당시 가지고 있던 돈을 이 영화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러나 흥행 참패.

자동차 기름 넣을 돈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빈털터리가 된 채 오빠 집에 얹혀살았다.

“이 나이에 남의 영화사 마케터로 들어가야 하나….” 제작자로서 나의 무능함에 좌절했다. 그때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은 충무로의 유명한 명제, “끝까지 남는 자가 승리한다”였다. 무조건 살아남아서 승리하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영화사인 ‘좋은영화’의 첫 작품, ‘주유소습격사건’을 그해 흥행 순위 2위에 올려놓으면서 보란 듯이 제작자로서 ‘승리’의 깃발을 충무로에 꽂았다. 이후에도 내가 제작한 ‘신라의 달밤’ ‘선생 김봉두’ 같은 휴먼 코미디가 대박을 터뜨렸고,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 ‘밀애’로 크고 작은 성공을 이어갔다.

‘끝까지 남는 자가 승리한다’는 말을 다른 의미로 곱씹게 된 계기는 2년 전에 찾아왔다. 2012년 야심 차게 제작에 나섰지만 결국 엄청난 빚을 안겨준 한 영화 때문이었다. 매달 이자를 갚느라고 카드 돌려 막기를 해야 했다. 불면의 밤들이 1년을 갔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30분마다 벌떡벌떡 일어나야 할 만큼 가슴에서 뜨거운 게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나둘씩 사람들 연락도 끊어졌다. 수군거림은 내 귀에까지 들렸다. “김미희도 한물갔다” “나이 들더니 작품에 감을 잃었다”….

참담했다. 야속했다. 머리를 비우려고 미친 듯이 청소를 하다가 ‘주유소습격사건’ 포스터를 보게 됐다. 암울했던 내 30대를 버티게 해준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끝까지 남는 자가 승리한다….

30대 때는 살아남은 후 찾아올 성공의 순간만을 바라본 것 같다. 이제 나이 쉰이 돼서야 승리와 성공이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됐다.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모멸과 비웃음도 무심히 흘려버려야 한다는 것을. 또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살아남기’이고, 그 자체가 이미 승리라는 것을. 왜 사람은 벼랑 끝에 서야지만 가슴속에 담아둔 명제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걸까.

마음을 비우고 나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망처럼, 영화 ‘숨바꼭질’이 내게로 왔다. 563만 관객과 함께. 이제 나는 다시 ‘끝까지 남는 자’가 되기 위해 홍대입구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러 간다.

김미희(영화사 ‘드림캡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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