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야에 씨앗 대신 지뢰”… 멈춰선 ‘세계 빵 공장’[우크라 곡창지대 르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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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1년〈中〉식량-에너지 무기화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에 있는 한 축사가 불에 타 기둥과 뼈대만 남아 있다. 지난해 3월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축사에 불이 붙어 1000마리가량의 소와 돼지가 몰살됐다. 체르니히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에 있는 한 축사가 불에 타 기둥과 뼈대만 남아 있다. 지난해 3월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축사에 불이 붙어 1000마리가량의 소와 돼지가 몰살됐다. 체르니히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키이우·체르니히우·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키이우·체르니히우·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11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북쪽으로 약 3시간 떨어진 체르니히우의 한 밀 농장. 씨를 뿌려야 하는 시기를 앞두고 있지만 농장 곳곳에는 총알 자국, 폭탄 잔해 등 공습의 흔적이 선명했다. 47년 경력의 농부 미콜라 테레셴코 씨는 “전쟁 전에는 밀 3000t을 창고에 쌓아두곤 했다. 지난해 3월 말 러시아군이 폭탄과 지뢰를 농장에 떨어뜨린 뒤 수확량이 3분의 1로 줄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비옥한 흑토를 보유한 우크라이나는 밀, 보리, 옥수수 등을 대량 생산해 ‘세계의 빵 공장’으로 불린다. 러시아는 지난 1년간 우크라이나 평야에 폭탄과 지뢰를 대거 투하했다. 곡물의 핵심 수출길인 흑해 항구도 봉쇄해 의도적으로 ‘식량 무기화’를 꾀했다. 로이터통신은 올해 우크라이나 곡물 생산량이 전쟁 전인 2021년보다 40.7% 줄어들 것으로 추산했다.

이로 인한 ‘애그플레이션’ 또한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농업’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로 곡물 등 농산물 값 인상이 주도하는 물가 상승을 뜻한다. 애그플레이션은 경제 구조가 낙후된 개발도상국에 더 큰 타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전 세계 식량 안보와 개도국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짓밟힌 곡창지대… “러시아가 대기근 일으킬까 두려워”


우크라 농장-시장 가보니

비료-연료-물류대란에 직격탄… “곡물 생산비용 감당 못해 최악”
식량난에 곡물가게-빵집 폐업… “빵 있는 한 삶은 이어진다” 희망도


식량 배급 받는 우크라 주민들 12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스비아토히르스크 마을 주민들이 ‘월드센트럴키친’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주는 음식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스비아토히르스크=AP 뉴시스
식량 배급 받는 우크라 주민들 12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스비아토히르스크 마을 주민들이 ‘월드센트럴키친’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주는 음식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스비아토히르스크=AP 뉴시스
12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베사라비안 전통시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30년째 식료품점을 운영했다는 나디야 브라우스 씨는 “전쟁이 길어지며 오랫동안 영업했던 상당수 곡물 가게와 빵집이 폐업했다. 곡물 가격이 비싸지자 사람들이 전통시장보다 싼 가격에 곡물을 파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으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 그의 가게 옆 곡물 가게의 셔터는 굳게 내려져 있었다. 인근 빵집 또한 간판만 남긴 채 텅 비어 있었다. 비옥한 곡창지대가 파괴되며 급등한 곡물 가격이 키이우 서민의 삶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이다.

테레셴코 씨 역시 “곡물을 생산해도 운송 수단을 구하기 힘들 뿐 아니라 물류 가격도 비싸다”고 했다. 그는 “도무지 오른 생산 비용을 감당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농부 인생 최악의 시기”라고 토로했다.

●러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비료 생산도 난항


전쟁 후 비료 생산이 어려워진 것 또한 식량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세계 최대 비료 생산국인 러시아가 서방의 경제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비료 수출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비료를 만들려고 해도 핵심 원료인 질소를 구하기 어려운 상태다. 질소는 천연가스에서 추출하는데 많은 나라는 그간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통해 질소를 추출해왔다.

베사라비안 시장에서 장을 보던 유리 크레민스키 씨 역시 “연료비 등 다른 물가가 곡물 가격을 더 끌어올리고 있다”고 했다. 전쟁 후 1년간 비료와 연료 부족, 물류 대란이 기존의 식량난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이미 우크라이나를 넘어 전 세계인의 밥상과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지난해에만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구가 3억45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지난달 추산했다. 전 세계 인구의 4%가 넘는 것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또한 올해 세계 곡물 생산량이 전년에 비해 1.7%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곡물 생산이 줄면 ‘애그플레이션’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지난해 2월 침공 후 5개월간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길을 차단했다. 전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고조되자 같은 해 7월 흑해를 같이 접한 튀르키예의 중재로 일부 수출을 허용하는 ‘흑해 곡물 협정’을 맺었다. 이후 한 차례 유효 기간을 연장해 올 3월까지의 수출을 겨우 보장받았다.

그러나 협정을 다시 연장하지 못하면 곡물 수출길이 다시 막힌다. 이는 사실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마음에 달린 상황이다. 전 세계 식량위기가 다시 고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소벨 콜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차장은 미 뉴욕타임스(NYT)에 “이 전쟁의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라며 “푸틴이 수백만 명을 빈곤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기근 공포 속 “빵이 있으면 삶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통치하던 1932∼1933년 스탈린 정권의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대기근을 겪었다. ‘홀로도모르’로 불리는 이 사태로 수백만 명 넘게 숨졌다. 이로 인한 반러 감정은 아직도 우크라이나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날 키이우에서 남쪽으로 1시간 떨어진 비타치우를 찾았을 때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빵가게를 운영하는 이리나 소브코 씨는 “러시아가 1930년대 대기근 때처럼 인위적인 기근을 일으킬까 두렵다”고 털어놨다.

다만 그는 “할머니께서 늘 ‘빵이 있는 한 삶은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어려운 환경이어도 계속 농사를 열심히 지을 것”이라며 의지를 다졌다. 그의 남편은 러시아의 공격을 우려해 한때 소브코 씨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우크라이나를 떠나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고향을 떠날 수 없었다며 “굴하지 않고 밀을 기르고 빵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키이우·체르니히우·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우크라이나#체르니히우#지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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