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매 대신 구호품 싣고 전쟁 피해지역 달려가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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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서 ‘전쟁 반대’ 시위로 화제… 스켈레톤 헤라스케비치 선수
러 폭격으로 무너진 스타디움서, 아이들 모아 체험행사 열기도
“전쟁 끝나 일상 돌아가는게 희망… 2026년 올림픽에 나가고 싶어요”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경기 뒤 전쟁 반대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는 
우크라이나 최초 스켈레톤 선수 블라디슬라우 헤라스케비치. 그는 올림픽 뒤 군 입대를 자원했지만 경험 부족으로 탈락하자 자선 재단을
 설립해 전쟁 피해지역에 구호품을 전달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경기 뒤 전쟁 반대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는 우크라이나 최초 스켈레톤 선수 블라디슬라우 헤라스케비치. 그는 올림픽 뒤 군 입대를 자원했지만 경험 부족으로 탈락하자 자선 재단을 설립해 전쟁 피해지역에 구호품을 전달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 남자 스켈레톤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선수는 금메달리스트가 아니었다. 18위를 기록한 우크라이나의 블라디슬라우 헤라스케비치(23)였다. 그는 경기를 마친 뒤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NO WAR IN UKRAINE)’가 적힌 종이를 중계 카메라 앞에 꺼내 보였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중국 베이징에서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그의 희망과 달리 올림픽 직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전쟁은 지금까지 5개월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그는 동아일보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인터뷰를 나눴다. 보내놓은 질문에 그는 5일에 걸쳐 답장을 보냈다. 모든 일을 마친 밤에야 시간이 났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의 모든 것을 바꿔 놨다. 그는 “이제 스포츠에서 얻는 성과보다 주변 사람들의 목숨, 조국을 지키는 게 중요한 문제가 됐다”며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뒤 그는 군 입대를 자원했다. 군사훈련 경험이 없어 탈락했다. 그동안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친구들은 점점 늘어갔다. 그는 “지금도 군에서 추가 동원이 되길 기다리고 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했다. 썰매를 싣고 대회를 다녔던 자동차에 구호품을 싣고 부차, 체르니히우 등 전쟁 피해 지역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3월 말 자신의 성을 딴 ‘헤라스케비치 자선 재단’을 설립했다. 본격 구호활동에 나서자 기업, 재단에서 후원이 들어왔다. 미국, 독일 등 봅슬레이·스켈레톤 동료 선수들이 직접 구호품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가 영웅처럼 여기는 스켈레톤 영웅 마르틴스 두쿠르스(라트비아)도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숙소와 일자리를 제공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

대회에 나서던 스켈레톤 선수의 생활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크라이나인들을 돕는 것이다. 매일 우체국에서 구호품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구호품을 배달하다 보면 하루를 길에서 보낼 때도 많다. 우크라이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밤에는 시간을 쪼개 해외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 응한다.

그는 구호품을 전쟁 피해지역에 전달할 때 스켈레톤 유니폼을 입고 국제대회 출입증인 AD카드를 맨다. 그는 “국제대회에서 우크라이나를 대표한다는 건 영광이다. 스켈레톤 종목에 우크라이나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평화 사절로 일하면서 동시에 스켈레톤이라는 종목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4월 러시아군이 점령했다가 떠난 체르니히우에 구호품을 전달하러 갔다. 여기서 폭격으로 부서진 가가린 스타디움을 목격했다. 최근 이곳을 다시 찾아 지역 아동 대상으로 스켈레톤 체험 행사를 열었다. 그는 “처음 갔을 땐 끔찍한 풍경이었지만 두 번째 갔을 땐 아이들이 스켈레톤을 배우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느꼈다”며 “이 아이들이 더 행복하려면 나중에 이 시설들이 다 재건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최초의 스켈레톤 선수인 그에게 지금 현실이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스켈레톤 훈련을 할 수 있는 전용 시설이 없다. 훈련을 아예 놓을 수 없어 이른 오전과 늦은 저녁 시간 체력훈련만 하고 있다. 그는 “그래도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전하고 싶다. 좌절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미래를 위해 더 강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시즌 국제대회에 나설 수 있다는 희망도 버리진 않았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가 가장 좋아하는 일인 스켈레톤을 다시 하고 싶다.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겨울올림픽에서 다시 우크라이나를 대표하고 싶다”고 밝혔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전쟁 반대#러시아 포격#스켈레톤 헤라스케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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