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의 사이공 순간”… 상처 입은 美외교 리더십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입력 2021-08-17 03:00수정 2021-08-17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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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아프간 점령]
‘아프간 최소인원 상주’ 계획 접고 美, 대사관 인력 전원 대피시키기로
내부서도 “매우 비참” 비판 잇달아… 美국무 “아프간軍한계” 오판 인정
아프간 대통령궁 장악한 탈레반… ‘제2 베트남’ 퇴로 찾는 바이든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의 지도부들이 15일(현지 시간)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에 모여 있다(위쪽 사진). 이날 탈레반의 카불 장악이 가시화하자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서둘러 해외로 도피했다. 그가 탈출 당시 엄청난 현금을 갖고 있었다는 보도까지 나와 국민 공분이 고조되고 있다. 같은 날 반팔 티셔츠를 입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인근의 대통령 별장 캠프데이비드 회의실에서 미 외교안보 수뇌부로부터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대한 화상 보고를 받고 있다(아래쪽 사진). 백악관은 이날 화상회의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마크 밀리 합참의장 등이 참석했다고 밝혔다. 카불·워싱턴=AP 뉴시스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속전속결로 끝나면서 이를 촉발한 미국의 아프간 철수 결정에 거센 역풍이 불고 있다. 9·11테러 20주년을 앞둔 시점에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 가능성 등이 제기되면서 불안이 커지는 상황이다. 워싱턴 정가의 공방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까지 높아져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력이 상처를 입었다.

15일(현지 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은 아프간 수도 카불에 있는 대사관 인력을 서둘러 전원 대피시키기로 했다. 최소한의 인력은 남기겠다는 당초 계획을 카불 함락 하루 만에 뒤집은 것이다. 미국 외교관과 직원들이 패닉 상태 속에 헬기까지 동원해 황급히 아프간을 빠져나가기 시작한 뒤 대사관에 걸려 있던 성조기는 내려졌다. 일부 직원은 아직 카불에 있다. 20년을 끌어온 미국의 아프간전쟁이 끝내 실패한 전쟁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 것이다.

스티브 스컬리스 미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는 “미 대사관의 대피는 매우 비참한 장면이다. 이것은 ‘바이든의 사이공 순간(Saigon moment)’”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뒤 1975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의 대사관 옥상에서 쫓기듯 헬기를 타고 탈출하던 것을 빗대 비판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스테로이드를 맞은 사이공(Saigon on steroid)’이라고 했다. 지금 상황이 베트남전 당시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CNN에 “아프간 정부군이 나라를 방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탈레반의 점령)이 우리 예상보다 더 빨리 일어났다”며 상황 오판을 사실상 인정했다.

탈레반이 미국에 보복성 테러를 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이날 상원의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화 브리핑에서 “아프간 내 테러리스트 그룹의 집결과 재건 속도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수정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방부는 앞서 6월 “미군 철수 이후 2년 안에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 테러 그룹들이 다시 힘을 얻어 미국 본토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이 속도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빨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USA투데이는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은 ‘미국이 돌아왔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정책 약속을 타격하는 결과”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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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토비아스 엘우드 하원 국방위원장은 “미국이 돌아왔다던 말은 어떻게 된 것이냐”며 “첨단기술을 보유한 파워 국가가 수류탄과 AK소총을 든 반군에게 패배하며 개입 20년 만에 탈레반에 나라를 넘겨주는 것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고 했다.

외신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철군 결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도와 방식이 문제라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철군 이후 상황에 대해 오판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비책도 충분히 세워놓지 않은 채 서둘러 이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6월에는 탈레반의 아프간 재장악 및 아프간 정부의 붕괴 시점을 두고 6∼12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했고, 불과 일주일 전에도 ‘향후 90일’ 정도로 잡고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5주 전 백악관에서 철군과 관련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면서 “탈레반이 나라 전체를 장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했다. 아프간 병력이 잘 훈련돼 있으며 탈레반의 역량은 따라가지 못한다고 호언했고 “사람들이 미국대사관 지붕에서 (헬기로) 들려 올려지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주말을 캠프 데이비드에서 보내고 있던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화상으로 아프간 상황을 보고받았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과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비롯한 정보당국 책임자 등이 참석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철군) 결정을 고수하고 있다”고 했다. 미군이 남아 있더라도 결국 탈레반의 재집권 및 이들과의 유혈 전쟁을 피할 수 없으며, 철군 이외의 다른 선택은 더 나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라고 한다. 그는 조만간 대국민 연설을 통해 아프간 상황 및 관련 정책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부통령과 상원 외교위원장을 지내며 수십 년간 외교 정책을 다뤄온 바이든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면서도 철군을 강행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미 탈레반과 철군에 합의했고, 당시 내놨던 철군 시점(5월 1일)은 더 빨랐다고 항변하고 있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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