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타고 시뻘건 불길 도시 삼켜… 무조건 바다로 뛰어들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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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이상기후 몸살]그리스 최악 산불… 최소 80명 사망

전날 도시 전체를 뒤덮었던 시뻘건 화염이 비로소 걷힌 24일(현지 시간) 오전 그리스 마티시(市) 포세이도노스가(街). 피해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선 구조 당국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불길에 휩싸인 건물에 갇혀 숨진 26명의 시신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이다. 그중엔 피붙이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한 듯 두 아이를 끌어안고 숨진 어머니의 유해도 있었다. 건물 근처엔 해변이 있었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이들의 탈출을 막았다. 로이터통신은 “이들은 탈출구를 찾으려다가 마지막엔 그곳(건물 안)으로 몰려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23일 그리스 수도 아테네 동부의 휴양도시 마티시를 휩쓴 대형 산불로 포세이도노스가 건물에서 발견된 이들을 포함해 최소 80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화재는 같은 시기 아테네 서부 근교에서도 발생했지만 피해는 마티시에 집중됐다.

중상자가 10여 명에 이르고 피해자 수색도 아직 끝나지 않아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역사상 최악의 산불 참사로 현지에선 ‘그리스판 폼페이가 발생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 ‘폼페이’ 연상시키는 ‘불지옥’으로 변한 휴양도시

“불길이 우리를 바다로 내몰았습니다. 우리 등 바로 뒤까지 화염이 쫓아왔기 때문에 바다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생존자는 로이터통신에 탈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불길이 도시 전체를 뒤덮어버린 상황에서 몸을 숨길 곳이라고는 바다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민과 관광객은 차를 타고 불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차도와 육로가 불길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상황을 깨달은 이들은 바다로 달리기 시작했다. 구조당국에 따르면 완전히 불타버린 차량들 대부분은 운전석에 열쇠가 꽂힌 채로 발견됐다. 그만큼 불길의 진행 속도가 빨랐다. 한 생존자는 뉴욕타임스(NYT)에 “무언가 타는 냄새를 맡았지만 그저 냄새일 뿐이었다. 하지만 불과 두 시간 후 불길은 도시 안에서 번지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운 좋게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포세이도노스가의 26명처럼 바다에 이르기 전 화염에 휩쓸린 사람들도 있었다. 가까스로 해변에는 도달했지만 끝내 물에는 몸을 담그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해변에서도 불에 탄 시신들이 발견됐다.

그리스 해안경비대와 어선 등의 도움으로 바다로 대피한 약 800명이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바다에서도 아비규환은 계속됐다. 익사한 사람들이 속출했고 탑승한 배가 뒤집어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다. 한 생존자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바로 옆에서 사람이 허우적거리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폴란드에서 온 관광객은 구조선이 전복되면서 사망했다.

생존자들은 24일 1000채 이상의 건물이 타 잿더미가 되어버린 도시를 돌아보며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가족에게 몇 번이고 애타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사라져버린 애완동물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디언은 “(마티시의) 거리는 생명이 사라진 곳으로 변해 버렸다”고 보도했다.

○ ‘이상기후’로 불길 빨리 번져

정확한 화재 원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BBC는 그리스 당국이 방화를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정부가 방화에 초점을 두며 부실한 산림 관리 책임을 피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최근 그리스를 괴롭힌 이상기후는 원인 불명의 불길이 빠르게 번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유난히 건조했던 지난겨울과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이 이어진 올여름 날씨로 인해 토양이 그 자체로 ‘불쏘시개’가 된 상태에서 강풍이 불어 화염이 쉽게 번졌다는 것이다.

아티카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24일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그는 이날 TV 연설에서 “그리스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을 겪고 있다”면서도 “슬픔이 우리를 압도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용기를 내고 단결할 시기다”라고 말했다. 아크로폴리스와 의사당 앞의 그리스 국기는 조기로 게양됐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등 유럽연합(EU) 소속 주변국은 화재 진압용 항공기를 급파하는 등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은 그리스의 친구들과 굳건히 함께 서 있다”며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됐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
#그리스#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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