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전범 4명 세기의 재판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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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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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들 항의하며 퇴정… 반성도 참회도 없었다

최대 200만 명을 학살한 장본인들은 아무런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27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외곽의 유엔 국제전범재판소 법정. ‘킬링필드’로 불리는 1970년대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의 민간인 대학살 사건 최고위 전범 4명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크메르루주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85),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79), 이엥 사리 전 외교장관(85), 이엥 티리트 전 내무장관(79·여) 등이 피고인. 이들은 집권 기간 국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70만∼200만 명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재판 첫날은 너무나 싱겁게 끝났다.

○ 반성도 참회도 없는 학살자들


4명의 전범은 이날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부당한 재판이라고 항의했다. 진한 검정 선글라스에 스키 모자 차림의 누온 체아는 심리 시작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듣기 거북하다”며 “변호인단이 상황을 설명해 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법정을 떠나 수감시설로 돌아갔다. 그는 “이 재판은 공정치 못하며 내가 신청한 증인들을 재판부가 채택하지도 않았다”며 “증인들이 출석할 때까지 공판에 나오지 않겠다”고 밝혔다. 부부 사이인 이엥 사리와 이엥 티리트 역시 재판에 항의해 한 시간 만에 퇴정했다. 전범 4인방은 수갑도 차지 않은 채 나란히 앉았으며 얼굴은 커튼 뒤에 가려져 노출되지도 않았다.

○ 전범 재판은 왜 30여 년 만에 열렸나


전범 4인방에 대한 본격적인 재판 절차는 9월부터 시작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나이 등을 감안할 때 최종 판결 이전에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붕괴된 지 32년이 흘렀지만 이들 4인방은 2007년까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살았다. 킬링필드의 총지휘자인 폴 포트는 1998년 병사했다. 유족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땅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캄보디아 정권이 처벌 의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크메르루주 시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이 정권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다. 훈 센 총리는 크메르루주의 지휘관을 지냈고,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도 부역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훈 센 총리는 국론 분열을 막으려면 추가 전범재판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고집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범재판이 시작된 것은 유엔의 집요한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캄보디아는 유엔에 맞서기엔 역부족이다. 유엔은 1억5000만 달러를 들여 캄보디아에 전범재판소를 설치했다.

○ 광기(狂氣)의 역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폴 포트와 이번에 재판에 나온 키우 삼판은 프랑스 유학파 지식인들이었고 동족 학살에는 캄보디아인 수백만 명이 거리낌 없이 동참했다.

캄보디아 전문가인 필립 쇼트는 저서 ‘폴 포트 평전, 대참사의 해부’에서 “혁명 완수에 대한 자기 과신과 조급증이 온순하면서 유머가 넘쳤던 청년 폴 포트를 폭력의 극단을 달리게 했다”고 분석했다. 또 스탈린과 레닌에게서 전수받은 폭력적 이념, 전임 론 놀 정권의 부정부패, 절대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캄보디아의 사회 분위기가 폭력을 뒷받침했다고 덧붙였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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