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5억달러짜리 ‘쇼’ 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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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대선전 야당후보들 정권비판 TV 생중계

4일 벨라루스 국영 TV에는 야당 대선 후보 9명이 함께 나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사진)의 실정을 비판하는 장면이 생중계됐다. 수백만 명의 국민은 두 눈을 의심했다. 1994년 집권 이래 악명 높은 철권통치를 펴온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루카셴코 대통령이 야당 후보들의 TV 출연을 용인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 많은 국민은 벨라루스에 민주주의의 싹이 트는 것이라는 기대도 가졌다.

하지만 이는 유럽연합(EU)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온 루카셴코 대통령이 직접 각본을 쓴 고도의 ‘쇼’였다고 미국 주간지 타임이 20일 보도했다. 19일 대선에서 4선 연임에 성공한 루카셴코 대통령은 곧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19일 개표가 한창이던 때 보름 전 TV에 나왔던 야당 후보 9명 중 7명이 비밀경찰에 연행됐다. 주요 야당 후보 블라디미르 네클랴예프 씨는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참가했다 경찰에게 폭행당해 뇌진탕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지만 사복경찰들은 병상에 누워 있던 그를 담요에 싸서 질질 끌고 갔다. 그는 현재 연락두절 상태다.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야당 후보 TV 토론쇼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2007년 벨라루스가 자국을 거쳐 유럽으로 나가는 러시아 가스관의 통제권을 요구한 뒤로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러시아는 보복으로 오랫동안 벨라루스에 특별가격으로 공급하던 석유가격을 국제시세대로 요구했고 원조도 중단했다. 그러자 벨라루스는 서방에 러브콜을 던지며 지난해 EU의 ‘동유럽 파트너십’ 기구에 가입했다. EU 역시 경제난에 처한 벨라루스에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30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며 화답했지만 이는 공짜는 아니었다. 벨라루스에 민주주의 시스템 도입을 요구한 것.

4일 야당 후보 토론이 생중계되자 화들짝 놀란 것은 러시아였다. 크렘린은 이를 벨라루스가 서방 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확실한 신호라고 판단했다. 닷새 뒤인 9일 모스크바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루카셴코 대통령의 회담이 급히 열렸다. 1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내년에 벨라루스에 면세가격으로 석유와 가스를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TV쇼 하나로 5억 달러 이상의 혜택을 챙긴 것이다. 대선 당일 벨라루스에서는 야당 지도자들을 포함해 약 600명이 체포됐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대선 승리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법에 따라 처벌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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